영웅의 서사시에는 그에 걸맞은 사랑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것은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장치로 사용되거나, 때론 사랑이 가장 강력한 힘이 되어 위기를 극복할 수 있게 해 준다.때문에 팬들과 작가 모두 그들의 모습이 멋지고 아름답게 그려지길 원할 것이다. 머릿속으로 가장 흔한 모습으로 사랑을 표현한 영웅의 모습을 떠올려보자면, 비슷한 나잇대의 남녀 주인공의 형태가 그려질 것이다. 작품이라 불릴만한 이야기가 생겨난 이후에 형식화된 이 구도는 현대에 이르러서 점점 발전하여 다양한 형태를 보여준다. 과거엔 사랑이란 것이 단순히 주인공의 종속적인 목표로 여겨지는 수동적인 대상에서, 시간이 흘러서 사랑의 대상이 적극적으로 극에 참여하는 형태로 변해왔다. 그리고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현대에 이르러선, 사랑이란 관계가 그려지는 모습은 여러 작품에서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엄브렐러 아카데미>에서도 그렇다. 이야기는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서로 다른 곳에서 임신하지 않은 여자들의 몸을 통해 동시에 태어난 초능력 아이들이 가족이라는 울타리로 함께하며 시작한다. 덕분에 주변인들 또한 범상치가 않아, 그들이 품고 있는 사랑 이야기 또한 무언가 다른 드라마에선 찾아보기 힘든 것들이었다.
넘버 파이브(좌) 돌로레스(우)
넘버 파이브 & 돌로레스
이 드라마의 주역이라고 할 수 있는 넘버 파이브(에이단 갤러거 분)에게도 사랑이 있다. 시공간을 넘나드는 그의 능력이 있지만, 그것을 제대로 다루지 못해 세상이 멸망한 먼 미래에 홀로 갇혀있었다. 덕분에 그는 45년이란 긴 시간 동안을 외로움 속에서 지냈는데, 그때 만난 사람(?)이 바로 돌로레스이다. 위의 사진에서도 알 수 있겠지만, 부서져서 제대로 일을 할 수도 없는 마네킹이 바로 그의 연인이다. 덕분에 그들의 관계는 일방향이 된다. 사랑을 하기 위해선 최소 두 명의 존재가 필요하지만, 그의 사랑은 그럴 수도 그럴 필요도 없다. 홀로 남겨졌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만, 덕분에 그가 보이는 애정은 특별하다.
주는 사랑도 사랑이다. 그것이 건강한 것인지, 아니면 끝을 부여잡고 질질 끌고 있을 뿐인지는 몰라도, 그것은 분명 사랑이다. 누군가를 향한 애정이 항상 답을 들려주는 것은 아니다. 사랑이란 감정을 보상으로 치환하기엔 너무나도 값지다. 하지만 대답 없는 사랑을 계속 갈망하는 것을 감내하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아프다. 그런데도 넘버 파이브는 순전히 주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사랑을 완성했다. 한 젊은 부부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남자가 큰 사고를 당하게 되어 그의 병간호를 하면서도 부부의 연을 놓지 않은 여자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말했다. 아직 젊으니, 하루라도 더 빨리 그를 떠나고 새로운 사랑을 찾으라고.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대답 없는 그에게 끊임없이 사랑을 말해주고, 힘없는 그의 손을 꼭 잡아주었으며, 보이지 않는 미래에서도 그와 함께 할 날을 그렸다. 다른 사람들은 이 젊은 부부의 이야기를 듣고 손가락질을 할 수도 있지만, 그들은 사랑을 할 뿐이었다.
그 젊은 부부의이야기 끝이 어떻게 됐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어떠한 문장 뒤에 마침표가 찍히더라도 그들의 시간은 분명 사랑이었음을 부정할 순 없을 것이다. 반쪽짜리 사랑이었지만, 분명 한 단계 더 나아간 사랑의 형태였다. 넘버 파이브의 것도 그러했다. 자신이 의지 할 수 있고, 자신에게 힘이 된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사랑은 완성되었다.
헤이즐(좌) 아그네스(우)
헤이즐 & 아그네스
어쩌면 평범하다 할 수 있는 만남과 사랑이었다. 도넛 가게의 주인과 단골손님의 만남으로 사랑을 싹 틔웠다. 다만, 그들 관계에서 조금 특별한 점은 그들의 나이 차이였다. 드라마에서 구체적인 언급은 없었지만, 실제 배우들의 나이 차이는 30살 정도로 적잖은 숫자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서로 사랑에 빠졌다. 헤이즐(캐머런 브리턴 분)은 커미션의 요원으로 앞서 말한 넘버 파이브의 제거 명령을 받고 매일매일을 피로 물들이며 살아왔다. 아그네스(쉴라 맥카시 분)는 반대로 순수한 모습으로 언제나 투명한 것들을 꿈꾸며 따스함으로 하루를 채워나가고 있었다.
가끔씩 어느 커플을 소개할 때 이런 수식어가 보인다. '나이차를 극복한' 물론 이것이 악의적인 목적을 갖고 쓴 수식어는 아니지만, 항상 이것을 보며 찜찜한 느낌이 들었다. 어떤 한 사람이 살아오면서, 시간이 누적되어 현재라는 점에서 모이고 하나의 존재가 된다. 그리고 그 순간에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그들은 극복하고 이겨내고 힘겹게 만난 것이 아닌, 단지 그 순간의 서로가 좋았을 뿐이다. 사랑은 그렇게 때를 가리지 않고 찾아온다.
그들도 그랬을 것이다. 헤이즐은 숨 가쁜 시간 속에서 길고도 편안한 안도의 한숨과 같은 그녀를 만났고, 아그네스는 저무는 노을에 대한 아쉬움을, 빛나는 별이 가득 담긴 밤하늘에 대한 기다림으로 바꾸게 해 준 그를 만났다. 서로의 시간 속의 한 점에서 서로를 원했다. 단지 그뿐이었다. 그것으로 사랑을 완성하고 그들은 함께 나아갈 수 있었다.
루서(좌) 엘리슨(우)
루서 & 엘리슨
그들은 특별한 존재였다. 루서는 괴력의 사나이로 거구의 몸집을 갖고 있고, 엘리슨은 '내가 소문을 들었는데'라는 말로 다른 사람에게 최면을 걸 수 있다. 드라마의 주인공들끼리의 사랑이었기에, 어쩌면 가장 주축이 되는 보통의 사랑 이야기였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들의 사랑이 색다른 느낌을 주는 이유는 그들이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담겨있기 때문이다. 물론 친부 친모는 서로 다르지만, 드라마 내내 그들이 하나의 가족이라는 점을 강조했다는 것에서 그 사랑은 다른 색을 띠게 된다. 그들의 것은 언제나 망설임이 앞서는 사랑이었다. 특별한 존재로 태어난 그들이 서로를 평범한 한 명의 사람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은 같은 곳에 서있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기에 서로 다가갈 수 없었다.
마음속 한구석에 담아두기엔 사랑이란 것은 너무나도 뜨겁다. 자신도 모르는 새 새어 나와서는, 말 한마디를 통해 손짓을 통해 또는 단지 눈빛만으로도 그 사랑이 전해지곤 한다. 함부로 입밖에 내지 못함은 그 수줍음과 두려움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입 밖으로 내기 전까지 그것은 어떤 모양으로 피어날지 모르는 작은 씨앗과 같다. 물론, 그 씨앗을 품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관계는 좋다. 단순한 친한 친구로, 어쩌면 그냥 친절한 이웃으로, 또는 든든한 직장 동료로. 흐트러지지 않는 모양으로 서로의 관계를 이어나갈 것이다. 그러다 서로의 포근한 바람이 좋아서, 서로의 따스한 빛이 좋아서, 서로의 부드러운 흙이 좋아서. 그렇게 뿌리를 내려볼 것이다. 사랑이란 꽃은 그제야 모양을 갖춘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생각했던 모양임을 장담할 순 없다. 누군가는 가시 돋쳤지만 화려하게 피어난 장미를 생각했을 것이고, 누군가는 아기자기하고 소소한 물망초를 생각했을 것이다. 서로가 원하는 사랑의 모양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꽃의 모양이 흐트러지게 된다. 그렇기에 사랑을 함부로 내놓을 수 없다. 영원히 품고 있을 씨앗만으로도 좋으니, 그냥 그렇게 살아가고 싶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히려 함께 피워낸 사랑의 모양이 영원하지 않을 것을 알기에 더욱 아름답다. 불완전함 속에서 위태롭게 사랑을 만들어가기에 그만큼 소중한 것이다. 루서와 엘리슨의 것도 그러했다. 먼발치에서 서로를 응원해주며 영원히 함께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사랑은 자신들이 힘겹게 지켜온 것들을 깨트릴 만큼 거대한 힘을 갖고 있었다. 서로의 마음을 내비친 순간 세상은 지금까지 살아왔던 시간과 전혀 다른 색이 되었다. 피어난 꽃은 아름다웠던 모습을 추억하며 천천히 시들겠지만, 피우지 못한 씨앗은 아쉬움과 후회를 품고 그 모양만을 간신히 유지할 뿐이다. 그들은 용기 있었고, 그들의 사랑은 그것을 양분으로 앞으로 찬란히 피어날 것이다.
이렇듯 <엄브렐러 아카데미>에선 여러 모양으로 사랑이 그려졌다. 그중에 정답이 있는지 없는지는 쉽게 말할 수는 없지만, 그 어느 것들도 사랑이 아니라곤 할 수 없을 것이다. 단지 각자의 방법으로 각각의 사랑을 이뤄가고 있었다. 어느 하나의 사랑조차 무미건조하게 다루지 않았으며, 감성과 노래를 담아 아름답게 그려냈다. 그것이 <엄브렐러 아카데미>가 갖고 있는 특색이자 매력이다. 시즌2를 파격적으로 마무리한 <엄브렐러 아카데미>의 이야기가 앞으로 어떻게 펼쳐질지 매우 기대가 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