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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호정 May 26. 2016

한 소년의 연대기,  어쩌면 누군가의 이야기

영화 <크로니클>에서 찾은 '앤드류'를 구해낼 방법

2011년 12월 어느 추운 날,

대구의 한 중학생이
집단 따돌림을 견디지 못해 자살했다.


당시 대한민국은 권모군(당시 13세)의 자살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에 휩싸였다. 무엇보다 그의 유서에 담긴 내용은 세상에 대한 분노는 커녕 오히려 그 누구보다 가족을 사랑하고, 자신에게 잘해주는 친구들과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담아냈기에, 소년의 죽음은 더더욱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 그리고 사건은 학교 폭력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며,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시키고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했다.


하지만 변화는 없었다. 사건 이후 학교 측은 그 문제를 중요시 여기지 않고 귀찮게만 생각했고, 국회에서는 단순히 친구사이에서 일어난 안타까운 사건정도로만 여겼다. 그리고 최근에는 학교를 포함해 군대, 직장 등등에서 이러한 집단 따돌림은 일상다반사가 되었고, 자살과 같이 큰 사회적 이슈에도 화제가 될 뿐 해결해야 하는 문제점이 아닌, 하나의 현상으로 자리 잡은 듯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사회의 모습을 담은 영화가 2012년에 개봉했다. 조시 트랭크 감독의 <크로니클(Chronicle)>에서는 이러한 집단 따돌림의 피해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초능력이라는 소재를 통해,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의 연대기(Chronicle)의 시작은 어느 한 소년의 집에서 카메라에 자신의 모습을 담으며 시작한다.


카메라를 샀어요.
그래서 모든 걸 촬영할 거예요.


주인공 앤드류(데인 드한 분)의 삶의 색은 무척 탁했다. 매일 술을 마시며 방탕한 생활을 하는 그의 아버지와 병색이 짙어 고통에 신음하는 그의 어머니는 집안의 분위기를 더욱 어둡게 만든다. 그의 집 밖의 생활 또한 다를 바 없었다. 학교에서 그는 집단 따돌림을 당하고, 이유 없이 맞거나 하는 일명 왕따와 같은 존재였다. 그런 그에게 카메라는 자신의 모습을 기록함과 동시에 누군가 그의 삶을 바라봐 주기를 원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는 그의 녹화된 모습을 통해 타인에게 받지 못하는 시선을 스스로가 제공하여 씁쓸하게 자신을 위로하기도 하며, 동시에 그의 삶을 기록할 만한 가치 있는 것이라고 여기게 되어 스스로가 삶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그의 모습은 영화 속 특별한 인물의 삶이 아니다. 살면서 한 번쯤은 보아온 어디에나 있음직한 삶의 모습이다. 거친 세상 속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자신에게 향한 시선들에 가시를 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은 그를 더욱 세상과 멀어지게 만든다. 때문에 그는 자신의 친척인 맷(알렉스 러셀 분)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함부로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고, 사람이 많은 파티에서도 맷에게만 의지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의 방어적인 모습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그를 약하게 보이게 만들었고, 결국 그는 파티에서 적응하지 못한 채 그곳을 벗어난다. 하지만 그때 그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스티브 : 염력이란 움직이고 올리고 흔들 수 있는 능력으로, 돌리고 당기고 깨뜨리는 충격을 주는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정신적이거나 초월적인 힘.
앤드류 : 친숙하게 들리네.


스티브(마이클 B. 조던 분)와 맷과 앤드류 이 세명은 어느 사건을 통해 초능력을 얻게 된다. 하지만 성장과정에 놓인 10대 소년들에게 이 능력은 단지 장난감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그 결과로 결국 앤드류가 사고를 내게 되고 다른 사람이 크게 다치게 된다. 맷은 이에 대해 이러한 초능력에 대해 규칙을 만들기로 한다.


영화는 10대들의 성장과정을 초능력이란 소재를 통해 급진적으로 보여주었다. 학교나 사회가 정해준 규칙 외에 자신에 대한 어떠한 규제도 없던 10대들에게, 스스로가 만든 규칙은 내면적 성숙을 이루게 만든다. 그들이 초능력때문에 만들게 된 스스로에 대한 규칙은 초능력이 없더라도 성장과정에서 필요한 것이고 굳이 정하지 않더라도, 경험에 의해 차츰차츰 모양을 갖춰 온전한 개념의 사람이 되도록 만든다. 스티브는 맷이 정하는 규칙에 동의했지만 앤드류는 그저 떨떠름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여기서 이러한 초능력에 대한 생각이 삶에 대한 방향을 정하게 된다. 어렸을 때부터 경찰이 되고 싶어 했던 맷은 정의감이 넘쳤으며, 이 능력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쓰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앤드류에게 이러한 능력은 그의 세상을 향한 가시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 뿐이었다. 그는 상처받은 내면을 더 이상 상처받지 않도록 숨기고 싶었고, 방어적인 태도를 고취시키는데 온전히 힘을 쓴 것이다. 하지만 그의 문제는 그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앤드류 : 맷.
맷 : 왜?
앤드류 : 넌 나 좋아하냐?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실재하다고 증명하고 싶었고, 자신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도 하였다. 그리고 매트에게는 '넌 나 좋아하냐?'라는 직접적인 표현을 하며 타인에게 애정을 갈구하기도 하였다. 이런 그의 여린 모습은 그에 대한 애잔한 마음을 불러일으키며, 그가 초월적인 능력을 가진 비범한 인물이 아닌 보통의 사람으로 보이게 만든다. 친구들은 그에게 자신감을 주기 위해, 학교에서 주최하는 행사인 '재능 쇼'에서 마술공연을 하게 한다. 그는 초능력을 이용해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그의 삶에 자신감을 불러일으키며 나아지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단편적인 해결책은 변화를 이끌어 내지 못하고, 이내 곧 실패하며 더욱 자신을 가두게 된다. 이것으로 영화는 이러한 문제의 해결은 그 대상자의 태도의 변화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떤 사람들은 집단 따돌림의 원인을 피해자의 탓으로만 돌리며, 상황을 냉소적으로 바라보기만 한다. 그러한 태도는 사회의 변화의 길을 막는 장애물이 될 뿐이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중심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바깥에서 먼저 사상적인 변화를 통해 변화 가능한 환경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영화에서는 상황을 극악으로 만들며, 그러한 제삼자의 냉소적 태도의 위험성을 보인다.


자연의 약육강식을 보면, 맨 위에 있는 것을 포식자라고 부르지?... 난 포식자야.


그는 타인과의 관계가 수평적이 아닌 수직적으로 놓여있고, 여태까지는 그 자신이 수직적 관계에서 아래의 취급을 받아왔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그에게 주어진 초능력은 그의 사상에 뿌리내린 수직적인 인간관계에서 자신 스스로를 꼭대기에 두게 만든다. 그리고 자신을 먹이사슬의 최상위 계층인 '정점 포식자(Apex Predator)'라고 스스로 칭하며 앞으로 행할 복수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고, 그 생각은 그에게서 죄책감을 지워버리게 만든다. 그리고 그의 복수는 자신을 괴롭히던 동급생의 이빨을 뽑는 것을 시작으로 가족과 무고한 시민들에게까지 번져나가며, 폭주를 하게 된다.


영화에서 보이는 그의 복수의 향연은 결코 통쾌하지 않다. 그의 폭주는 자신을 괴롭혔던 주변뿐만 아니라 불특정 다수에게로 번져나가며, 사회에 대한 분노를 보여준다. 세상의 모든 것을 파괴하고 파멸로 이끄는 그의 모습은 공포를 떠나 안타까워 보인다. 그것은 그가 보여준 '타락상(墮落相)'의 원인이 주변의 냉소적인 사회에서 나온 것이며, 우리는 그 앞에 한없이 무력한 모습일 수밖에 없었던 '한 사람'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맷의 일격으로 죽어버리고 사건을 일단락 난다.


잘 있어 앤드류.


맷은 사건 이후 홀로 여행을 다니며 답을 찾고 있었다. 그는 앤드류에게 '넌 나쁜 사람이 아니란 걸 알아. 그게 더 문제였겠지.'라고 말하며, 영화는 이 사건의 원인이 앤드류에게 놓여있지 않음을 맷의 입을 빌려 말해준다. 그리고 앤드류에게 사랑한다라고 말하며, 그에게 결여된 타인의 애정을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집단 따돌림에 대한 해결책을 엿볼 수 있다. 집단 따돌림의 원인을 온전히 '피해자의 탓'으로만 돌리지 않아야 하며, 그들에게 애정과 관심을 보일 때 이것의 해결의 길은 열린 것이라는 점을 마지막 맷의 말로 설명한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모습을 영화 속의 '카메라'로 담아냈다. 그리고 이성을 잃어가며 앤드류가 했던 행동들 또한 주변의 카메라를 모아 자신을 촬영하게 한 것이다. 영화에서 처음부터 그를 끝까지 관찰한 카메라는 그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고 단지 방관만 하고 있고, 그것의 시선은 영화 밖 관객들에게 그대로 옮겨진다.


앤드류가 결국 자신을 잃어버린 원인은 '초능력'이 아닌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사회의 차가운 시선과 안일한 태도에 있었다. 그리고 영화 밖 현실에서의 '초능력이 없는 앤드류'의 선택은 자살이었다. 그들의 자살은 단순히 사건을 넘어 우리에게 말을 해주고자 하는 하나의 신호이며, 우리는 그 신호를 받고 무시나 방관이 아닌 해결을 할 수 있도록 맷이 그랬던 것처럼 애정과 관심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그런 작은 변화가 한 명 한 명에게 이루어진다면 영화 밖 수많은 앤드류를 구해 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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