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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호정 Jun 03. 2016

'작품'과 '상품' 사이

영화 <파인딩 포레스터>에서 찾은 '작품'의 의미

'글쓰기'와 '글 읽기'


이 두 개의 단어는 꽤 어렸을 때부터 우리의 생활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었다. 어릴 때 쓰던 일기는 글쓰기에 포함되고, 쉽게 읽던 동화책 또한 글 읽기의 한 부분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이어져 현대에는 소셜 미디어를 통해 쉽게 글을 접할 수 있는 것과 동시에, 지금도 주변에서 수많은 글들이 쏟아져 나오고 우리는 그것 사이에서 생산과 수용을 반복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글쓰기라는 것이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잘못된 방향의 글은 사람들의 입을 타고 오르내리며 그 사람 자체를 평가받기도 하고, 그것을 읽는 과정에서도 가벼이 수용하며 겉핥기식으로만 정보를 받아들이기도 한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라는 말은 현대에 와서 '글 한 줄로 천만 비난 앞에 놓인다.'라고 여겨질 정도로 글에 대한 접근성이 쓰기와 읽기를 모두 포함한 양방으로 좋아짐에 따라 그것의 힘은 더욱 커지게 된다.

 

글이 갖고 있는 영향력이 강해지는 만큼, 좋은 글을 쓰는 것은 더더욱 사람들을 고민에 빠지게 하고, 그것을 수용하는 자세에도 적잖은 노력을 필요하게 만든다. 이러한 글쓰기를 소재로 2001년에 한 영화가 개봉했다. '거스 밴 샌트' 감독의 <파인딩 포레스터>가 바로 그것이다. 세상을 등진 백발의 작가와 16살의 한 흑인 소년의 만남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 사람 본 적 있어?
'창문'씨 말이야? 아니, 하지만 그 사람은 우리를 보고 있어.


'창문'씨로 불리던 '윌리엄 포레스터(숀 코너리 분)'는 '아발론 착륙'이라는 유명한 책을 쓴 작가이며, 이후에는 은둔 생활을 하고 있었다. 10대들에게 이런 그의 모습은 호기심을 불러일으켰고, '지멜 월레스(롭 브라운 분)'는 친구들과의 장난으로 그의 집으로 들어가게 되며 우연한 인연의 출발점에 놓이게 된다. 윌리엄 포레스터는 그의 글을 고쳐주는 것을 계기로 월레스의 젊은 패기와 함께 그를 자신의 제자로 받아주게 된다. 이런 백인 노인과 흑인 소년의 벽은 글쓰기를 통해 무너질 수 있었다.


이렇게 시작된 그의 글쓰기에 대한 가르침은 단순하면서도 쉽게 간과할 수 있는 팁들로 출발한다.

자기 자신을 위해 쓴 글이 다른 사람을 위해 쓴 글 보다 훨씬 나은 이유는 뭘까?


'자기 자신'을 위해 글 쓰기.


포레스터는 그에게 자기 자신을 위해 쓴 글이 다른 사람을 위해 쓴 글보다 훨씬 낫다면서 그것의 이유에 대해 물었다. 그것의 답은 글에 대한 진정성과 직결된다. 자신의 것이 아닌 타인의 것을 기준으로 글을 쓴다면, 그것은 단순히 타인이 좋아하는 소재를 맛보기 쉽게 요리해놓은 글일 될 뿐 정작 글쓴이의 입장에서 그것은 단순히 거짓을 유려한 단어들로 꾸며 자신의 글을 작품이 아닌 상품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런 글들은 독자들의 글에 대한 소모적인 태도에 촉매가 되고, 결국 작가와 독자 간의 올바른 관계가 형성되는데 방해가 되기만 한다. 따라서 자기 자신을 위해 글을 쓴다면 자연스럽게 글에 진정성을 담게 될 수 있게 되고, 독자들의 마음속 깊이 다가설 수 있게 된다.


우선 가슴으로 쓰고, 머리로 고치는 거야.


작문의 첫 번째 열쇠 '그냥 쓰기'


타자기 앞에서 망설이는 월레스에게 포레스터는 '그냥 써라'라고만 말한다. 그는 우선 가슴으로 쓰고, 후에 머리로 글을 고치면 된다면서 타이핑을 해보라고 재촉한다. 물론 글의 첫 문장을 떼는 것은 매우 힘들 수 있다. '백지 공포증'이라는 단어가 있듯이, 넓은 흰 종이 위에 첫 문장을 떼지 못하고 그것이 지속될 때 두려움으로 느껴지는 것은 유명 작가들도 겪는다는 흔한 현상이다. 이러한 두려움 앞에 포레스터는 한 가지 방법을 알려주는데, 그것은 바로 베껴쓰기이다. 자신의 예전 글을 주며, '타이프의 단조로운 리듬이 페이지를 넘기게 해주지. 그러다 자신만의 단어가 느껴지면 쓰기 시작하는 거야.'라고 말하며, 베껴 쓰면서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이 글의 첫 문장에 대한 두려움을 지워줄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후에 자신만의 다른 단어들로 글을 이어서 쓴다면 작문의 첫 단계를 통과할 수 있게 된다.


앞선 두 가지의 요소를 통해 글을 쓴다면, 글에 대한 두려움없이 진정성을 담아낼 수 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포레스터는 이러한 노하우를 가지고도 처음으로 낸 책인 아발론 착륙이후에 또 다른 책을 출간하지 않았다. 그가 비판한 것은 독자들의 태도에 있었다.


비평가들이 내가 정말 의도했던 것에 대해서 이거네 저거네 헛소리를 시작했을 때,
난 결심했지. 한 권으로 족하다고.


그는 자신의 최고의 순간은 '초안을 작성하고 그것을 혼자 읽어 볼 때'라고 얘기했다. 그리고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글을 해체하고, 비평가들이 마음대로 해석한다면서 더 이상 글을 쓰지 않기로 했다. 이러한 상황은 비단 영화 안에서만 있는 일이 아니다.


'북어', '아마존 수족관', '대설주의보' 등의 시를 쓴 '최승호'시인은 그의 시와 관련된 수능 및 모의고사 문제를 풀어본 결과 '모두 틀렸다'며, 현재 대한민국의 교육 환경이 제공하는 작품에 대한 수용 방법에 문제점을 제기했다. 작가가 쓴 글을 쓴 방향과는 전혀 다른, 타인의 시선에 의한 해석은 한국의 주입식 교육과 함께 그들의 작품을 단순 기출문제로 만들며 이러한 태도가 누적되어 이후에 문학에 대한 올바른 감상 방법을 형성시킬 수 없다. 이런 태도는 영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영화가 개봉하고 그 영화를 볼지 안 볼지 정하는 요소는 대부분 그 영화가 드러내고 싶은 주제에 있지 않다. 그것들이 평가받은 별점이나 재미정도가 그 영화의 흥행을 정하기 마련이다. 물론 이런 표면적인 평가는 영화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관객의 입장에서 영화에 대한 감상이 이러한 태도에서만 멈춘다면 그것은 영화를 작품이 아닌 상품으로 관객 스스로가 만드는 것이다. 때문에 '영화 어땠어?'라고 묻는다면, 대답은 '재밌었어', '재미없어'라는 두 가지 대답으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영화에 대한 평가가 단순히 재미나 연기력과 같은 표면적인 면에 국한되지 않고 영화가 내포하는 의미와 감독이 드러내고 싶어 했던 주제에 대한 고찰을 포함할 때, 영화에 대한 올바른 감상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렇게 여러 작품의 감상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취할 수 있을 때, 그것은 기출문제나 상품이 아닌 작품이라는 본연의 의미와 목적을 담아낼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에서는 윌리엄 포레스터가 '110회 연중 작문 심포지엄'에서 월레스의 글을 읽어주며 그 글이 독자들에게 진정성을 담고 다가가고, 독자들 또한 그 글이 포레스터의 입을 통해 편견 없이 다가올 수 있게 되어 그의 작품이 드러내는 진정한 의미를 감상할 수 있게 되었고, 기립박수로 월레스의 퇴장을 꾸며주었다. 그리고 포레스터와 월레스는 서로를 친구로 칭하며 서로에게 하나의 의미가 되었다.


이렇게 영화 '파인딩 포레스터'는 글쓰기와 글 읽기에 대한 길을 제시하며, 그것들이 본연의 의미를 담아낼 수 있도록 하였다. 글을 포함한 여러 작품들이 소셜미디어의 발달과 함께 우리들을 쉽게 오갈 수 있게 된 현대에서, 그 안에 두려움없이 진정성을 담아내고 그것에 대해 올바른 감상의 태도를 취할 수 있을 때 그것들은 상품이 아닌 진정한 의미의 작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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