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은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 (Yogyakarta) -
여행지에 도착하고 며칠은 이상하게 마음이 붕 떠 있어 글 몇 줄 적기도 어렵다. 게다가 숙소 방 안에 적당한 책상이라도 없을라치면, 평소엔 어디에도 머리 기대는 법이 없는 사람임에도 내쳐 누워만 있게 된다. 족자카르타 사흘 차, 지금 딱 그러고 있는 중이다.
예정보다 갑자기 8일을 일찍 당겨오느라, 게다가 출발 이틀 전 허둥지둥 이사까지 하고 와 혼을 다 빼고 왔더니 피로가 풀리지 않는다. 나이 먹을수록, 피곤하면 슬프다. 피곤해서 슬프고, 슬퍼서 더 피곤하다. 특별히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은 잡념을 만든다. 잡념이 제일 무섭다. 젊었을 적엔 사유와 낭만이었을 생각의 화두가 점점 커지다 머지않아 눈사태를 일으킬 작은 눈 덩이와 다르지 않다.
잡념에 잡아먹히지 않으러, 걷는다. 이 더위에도 부러 걸으러 나간다. 왕궁 근처 광장 알룬알룬키둘(Alun-alun Kidul)을 네 바퀴 돈다. 그래봤자 사십 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군데군데, 냄새가 구리다. 네 바퀴를 도는 동안 노래 부르는 맹인 가수는 두 바퀴 쯤을 돌고 있다. 이곳 거리엔 돈을 구하는 이들이 곧잘 보인다. 돈을 얻기 위해 그들은, ‘무엇’이든 한다. 온몸에 갈치 같은 은빛 칠을 하고 동상처럼 서 있거나, 이 더위에 미니마우스 탈을 쓰고 춤을 추거나, 되도 않는 박자와 음계로 기타를 치고 노래를 한다. 이들을 지칭하는 명확한 직업명도 있다. 쁭아멘(pengamen). ‘거리의 악사’쯤으로 사전은 설명한다.
쁭아미스(Pengamis)와 헷갈리면 안 된다. 노력 없이 구걸만 하는 걸인, 말하자면 거지를 의미하는 단어다. 지금까지도 술탄과 왕궁이 건재한 족자카르타. 오래 전, 왕실이 목요일(하리 까미스 ; Hari Kamis)마다 왕궁 근처 백성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 준 데에서 유래한 단어라고도 전해진다. 어제도 만나고 오늘도 두 번이나 스쳐 지나는 쁭아멘에게 5,500 루피아를 건넨다. 480원 쯤 된다. 거리의 악사에게 얼마쯤을 건네면 적당한지 알 만큼은 익숙해졌다.
어제는 광장에서 아침으로 부부르아얌(bubur ayam ; 닭죽)을 사먹었고, 오늘은 즉석에서 구워주는 아랍 식 빵과 조각과일, 과일이 반신욕 하고 간 듯 맛이 희미한 물 한 병을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대학교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새벽 6시부터 9시까지 과일을 판다는 여대생들에게 친구들과 다시 올 것을 약속했으나, 과일 맛이 그닥이라 약속을 지킬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 미소가 눈에 아른거려 혼자라도 다시 가야지.
이 더위에도 뜨거운 커피가 맛있을 만큼도 익숙해졌다. 에어컨 기능 좋은 숙소 방보다 몇 배 더 더운 카페에서 삐질삐질 땀 흘리며 글을 끄적이고 있으니, 더위도 그만그만해졌나보다. 여름철엔 물거나 해칠 듯 짜증이 많아지는 사람이었는데, 어느새 장자가 되었나. 한 발 떨어져 내 더위를 바라본다. 덥구나, 더워도 살아지는구나. 숙소에 돌아가면 곧 땀이 식을 테니 괜찮아. 한 발 떨어져 바라보기. 여행을 오면 저절로 되는 일이 돌아가면 어려워진다. 얼마나 많은 집착으로 얼마나 허둥대며 살아가려나. 딱 한 발자국 떨어져서 바라보고, 딱 한 걸음 늦게 가도 개의치 않는다면 사는 게 훨씬 더 자유로울 텐데.
아무 때에 아무 일이나 스스럼없이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혼자 하는) 여행의 시간이 그나마 삶의 맷집을 키운다. 여행지에선 얼마나 씩씩하게 걷는지 모른다. 내딛는 발꿈치가 당당하다. 아무 눈치도 보지 않으니, 그게 된다. 배려라고 생각했던 행위의 꽤 많은 부분이 눈치 보기였다. 이따금 ‘못돼져야지’ 벼르는 일은, 다부져 지겠다는 다짐의 다른 말이다. 쓰다 보니 어느새 주사가 되어간다. 내 모든 글의 운명이다. 피로가 찐득거린다. 걷기는 어려운 시간이니 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