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1월 22일, 오전 10시 59분. 딸이 내게 왔다. 네 시간쯤 요리조리 몸을 비비 꼬다 세상에 나왔으니, 날 때부터 순했던 편이다. 철없는 엄마는 고것도 못 참곤, 의 사 선생님께 집에 보내 달라고 징징거렸다. 왠지 침대만 벗어나면 안 아플 것 같은 기분. 집에 안 보내주면 바닥에 눕겠다고 떼를 썼다. 물론, 제정신이 아니었다. 두 번 의 자연유산 뒤에 찾아온 첫 아이. 모두가 반겼다. 아들이 아니면 쳐다도 안 볼 시아 버님마저도. 아이는 아기 때부터 의젓했다. 아무리 엄마가 들고 날뛰어도 야구장에서도, 김건모 연 말 콘서트장에서도 잘 잤다. 함성에 깰 때면 그저 입과 눈을 동그랗게 모으고 엄마를 바라보기만 했다. 말간 웃음과 함께.
우는 일 거의 없는 아이가 라식수술 예약한 전 날, 정말 숨넘어가게 저녁 내내 울었다. ‘동생이 생기면 먼저 알고 샘내서 우는 경우 도 있다더라.’ 시어머니 말씀을 저녁에는 한 귀로 흘려들었다. 다음 날 아침, 수술 당 일엔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어 (거의 재미 삼아) 테스트해 보니 예정에 없던 둘째가 존재를 드러냈다. 임신과 라식은 병행할 수 없기에 라식을 취소했다. 임신인 줄 모르 고 수술을 했더라면 아마, 둘째를 포기했……. 앗. 말도 안돼. 큰아이가 둘째를 지켜 주었다는, 신화 같고, 전설 같은 이야기를 나는 철썩같이 믿는다.
21개월 만에 누나가 되었으면 샘낼 만도 하련만, 엄마보다 의젓하게 동생을 챙겼다. 길에서건, 마트에서건 정신없이 앞서가는 엄마 뒤에서, 더 정신없이 갈팡질팡하는 동 생을 챙겼다. ‘예주나~ 예주나~!’ 거푸 동생을 부르던 아이의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선하다. 목욕탕에 가면 등받이 없는 의자에서 동생이 뒤로 자빠질까 봐 짧은 팔을 동 생 뒤로 둥글게 둘렀다. 심술 맞은 동생이 쥐어박고 머리를 쥐어뜯어도, 질질 끌려가 면서 ‘예준이가 나를 너무 좋아해서 그러는 거’라고 울먹이던 아이. 미워할 구석이 없 었다. 지금까지도.
109 센티미터. 생일이 1월이라 일곱 살에 제일 작은 키로 일 학년이 되었다. 드러나 지 않게 학교에 다녔다. 성실한 거에 비해 성적은 늘 안 나왔고, 연년생 동생과 함께 하는 모든 수업에서 동생보다 처졌다. ‘엄마, 나는 학교에서 존재감이 없어.’라는 말을 하는데 슬퍼 보이지 않았다. 잘해야 한다는, 튀어야 한다는 강박을 느끼지 않게 잘 감싸주었다. ‘너는 존재 자체로 소중하고, 존재 자체로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임을 수 시로 느끼게 해주었다(운영하던 영어학원에 붙여둔 글귀이기도 하다). 작은아이의 영 민함보다 큰아이의 성실함을 늘 더 추켜세웠다. “엄마, 우리 집은 너무 내 위주로 돌아가는 것 같아.”라며 딸은 동생의 세계를 살폈 다. 작은 아이는 말했다. “엄마, 누나에겐 늘 좋은 일이 많이 생기는 것 같아.” 그런 면에서 나 역시 둘째에게 부채감을 갖고 있기도 하다. 지금은 둘째에게 하염없이 마 음을 보낸다. 잘 받아주는 걸 보면, 너무 때늦진 않은 것 같다.
‘너는 언제 사춘기였냐’ 물으니(정말 기억에 없어서), ‘엄마, 나도 기억이 안 나. 난 사 춘기가 없었던 거 같아.’라고 딸은 답한다. 허락 없이 전학시켰다고 국민학교 5학년 때 시작된 사춘기를 지금껏 앓고 있는 나로서는 ‘세상에 이런 일이’에 가까운 일이다. 사람 안 변한다는 말은 딸에게도 맞는 말이고, 내게도 적합한 말이다. 딸이 평생 의 젓한 사람으로 살 수 있었던 건 평생 철없는 엄마 덕이다. 아니, 탓이다.
엄마, 난 엄마 덕에 벌레를 아주 잘 잡아.
엄마, 런던에 있을 때 친구들은 엄마 음식 먹고 싶어 엄청 애달파 하던데, 난 별로 그리운 음식이 없어서 편했어. 엽떡이 좀 먹고 싶기는 했지만.
엄마, 엄만 나오지 마. 엄마 비위 약하잖아. 내가 챙겨서 데리고 올라올게. (대학교 신 입생 동생이 고주망태가 되어 택시에 토하고 난리라고 기사님 전화 오니, 나를 방에 집어넣고 데리러 감. 신발도 물로 헹궈 냄. 가장 양심에 찔리는 대목. 딱 한 번이라 다행이다.)
엄마, 내가 엄마 책방 예쁘게 꾸며놓을게. 그러니까 미리 가보지 마. 완전히 완성된 다음에 짠! 하고 볼 수 있게 해줄게. (이후 이곳은 내게 엄마 품처럼 편안한 곳이 되었다.)
언급하자면 이런 예는 수도 없다. 삼촌 같은 엄마를 만난 것도 지 복이고, 엄마 같은 딸을 만난 것도 내 복이다. 그런 딸 생일 아침에 고작 나는, 쌀밥에 미역국만 끓이고, 잡채와 갈비찜을 배달 음식으로 대치했다. 미역국은 기막히게 맛있었다(웬일!). 이런 지경인데도 너무 친한 우리. 내가 잘하는 무언가가 있을 거라고 우기지 않을 수 없다.
그에 더해 딸은, 대부분의 질문에 답을 주는 사람이다. 내 인생의 가이드북이라고나 할까. 대단히 명석해서라기보다 일단 성격이 쿨하다. 오래 고민하지 않고, 지난 일 후 회하지 않는다. 명쾌하고 산뜻하다. 아빠 쪽 성향이다. 아들은 똑 나 같은데, 그나마 나보다는 낫다. 이래저래, 아이들에게 너무 의지하지 않으려 애쓰고는 있다. 부탁은 잘 하지 않는다. 깍쟁이처럼 굴 때도 많다. 그러다 보니 다른 모녀, 모자 관계에 비해 얼그렁 덜그렁 부대끼고 치대는 맛은 덜하다. 너무 정 없이 사는 건 아닐까, 때때로 고개를 갸우뚱 하기도 한다. 어릴 때도 안 하던 간섭을 이제 와서 할 수도 없고. 그 저 지켜보고 응원만 할 밖에.
생일 꽃과 뽀글이 잠바(내가 입고 싶어 산 거긴 하지만), 제주항공 포인트를 선물했 다. 아이가 자주 떠났으면 좋겠는데, 일이 우선이라 너무 안 논다. 포인트가 있으니, 일에 치인 어느 날 문득 훌쩍 떠나고 싶어지길 바란다. 1월 22일의 생일 꽃은 의외로 ‘이끼’. 주황, 연두, 빨강, 하늘색의 스칸디아모스 공기정화용 이끼를 선물했다. ‘이끼 는 아주 작고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지구 생태계에서는 '어머니 같은 존재'라 불릴 만 큼 필수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존재라고 한다. 꽃말이 ‘모성애’이기도 하다. 늘 살피는 존재로 살기를 바라지는 않지만, 돌이켜보면 그렇게 타고난 성품인 것 같긴 하다. 동 생에게도, 나에게도, 아빠에게도, 할머니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허나, 늘 딱 부러지 게 선을 지킨다. 자기 세계를 적당히 지킬 줄 안다. 다행이다.)
생일 카드에 엄청난 질문을 던졌다. ‘혹시 네가 내 엄마의 환생인 건 아닐까?’ 날짜 계산기를 돌려 보니, 엄마 돌아가시고 1,037 일 만에 딸이 태어났다.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다. 그렇다면 좀 더 치대도 되겠다. 내가 주는 것도 내리사랑, 딸이 주는 것 도 내리사랑이라고 우겨도 되겠다. 무엇보다 딸은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밝고 환한 존재라 감사하다(아들보다 사랑한다는 뜻은 아님). 그 덕에 어두워도 덜 어둡게 산다. 딸 생각만으로 마음 가운데에서 새벽 바다 밝아오듯 빛이 번진다.
오늘은 그러니, 얼 마나 행복한 날인지. 그런 생각 끝에 소소한 좋은 일을 하나 했다. 앞으로는 딸 생일, 아들 생일마다 작은 선행을 하나씩 해볼까 한다. 아들 딸 덕에 좋은 사람으로 살게 된다. 그나저나 나도 애쓴 날. 남아 있는 제주막걸리 한 병을 따야겠다. 지금, 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