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순 공부방
정헌 + 보리 = 승윤 예준
덕균 + 승윤 = 종헌 지인
010-52*5-*51*, 010-4*49-5*4*, 010-5*62-……
용인시 기흥구 연원로 ……
충북 영동군 영동읍 ……
암호 같은 글자가 종이에 빼곡한 것이 학창 시절 벌 삼아 했던 깜지 같다. 이을순은 왜 매일 저녁 깜지를 하는 것일까. 공부이자 수행이다. 아들딸 가족의 이름과 조합, 전화번호, 주소 등등. 기억이 소멸하지 않게, 적어도 본인에게 가장 중요한 이 몇 개의 정보만큼은 눈을 감는 순간까지 잊지 않을 수 있게 그녀, 매일 밤 쓰고 또 쓴다. 뒷장엔 계산 식. 스스로 만들고 스스로 푼다. 속도는 점점 느려지지만, 그래도 서지만 말고 머리가 잘 돌아갔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 산수를 한다. 덧셈 뺄셈 곱셈 나눗셈, 사칙연산을 넘나든다. 아직은 괜찮다. 혼자 마트에 다닐 만 하고, 가계부도 잘 쓴다. 그래도 공부를 멈추지 않아야 한다. 멈추면 순식간에 다, 사라지는 것들.
치매를 걱정한다. 그것이 자식한테 가장 짐 될 일이기에. 외고 적고 식 만들고 풀고 하는 그녀의 매일의 공부가 힘들어 보였는지 손녀가 한 며칠 문제를 내드렸다. 채점도 꼼꼼히 해드렸다. 100점 맞으면 궁둥이 춤을 추겠다고 자극도 준다. 며칠 그리 공부하다 어느 날 송승윤이 문제집을 사 들고 왔다. 기탄 수학 H2, H3. 기초 탄탄 수학 공부, 기탄수학은 송승윤도 어렸을 적 꾸준히 풀었던 산수 문제집이다. 이을순은 쓸데없이 오천 원을 썼다고 몇 번 타박하고는 이내 책을 펴고 상에 앉는다. 깜지도 하고 문제집도 푼다. 매일 정해진 양을 풀고, 밤이면 손녀가 채점해준다. 몰입도가 수험생 못지않다. 새벽에도 풀고, 이불 위에서도 풀고, 밤에도 풀고, 밥상을 무르자마자 풀기도 한다. 실력이 는다. 세 자릿수 곱셈 나눗셈도 거뜬하다. 어느 때 보면 눈이 퀭해져 걱정될 지경이다. 밤에 공부를 하니 잠이 잘 온다며 원래 그런 거냐고 묻는다. ‘공부를 시작하면 바로 잠이 오긴 하던데요’ 김보리는 하나 마나 한 말을 하는데 들리진 않는 눈치다.
나이 먹을수록 재미도 주는데, 무어든 재미 붙이는 일이 있는 것은 좋은 일이다. 최근 가장 몰입하는 일이다. 시간도 잘 간다. 때로는 상으로 혹은 벌로 돈이 오가기도 한다. H2 권을 다 뗀 날 송승윤은 이을순에게 진짜 상을 주었다. 할머니 취향을 잘 아니까 책거리 상품은 다름 아닌 ‘찹쌀’. 4kg 큰 봉지를 턱 사드렸다. 바로 새 책으로 넘어가도 좋으련만, 헌책 빈자리가 아깝다고 그 위에 또 문제를 새로 만들어가며 푼다. 아낄 걸 아끼시라 간곡히 말씀드리지만 통할 리 없다. 그녀의 공부는 친구들에게서도 뜨거운 반응을 얻은 모양이다. 문제집을 쭉 넘겨보며 ‘을순이 참 대단타’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단다. 언제고 어르신들 산수 경시대회가 열린다면 참 좋겠다. 문제집 회사 뭐하나요. 책도 팔리고, 어르신들께도 득이 되는 참 공익적인 이벤트가 될 텐데. 내가 먼저 선수 쳐야겠다. 어르신들, 공부합시다!
을순 수첩
열 마디, 백 마디 말보다 진한 이을순의 손글씨. (플러스 용돈)
받고 살기만 하셔도 될 나이다. 주는 것만도 감사할 일인데 언제나 꾹꾹 눌러쓴 손 편지가 함께 한다.
그 어떤 미사여구도, 강렬한 웅변도 이겨낼 수 없는 진정성의 힘, 사랑의 힘을 담고 있다.
띠궁합
송승윤이 영국으로 공부하러 떠날 때, 걱정스레 이을순이 물었다.
“거기도 띠가 있어-?”
“에이, 그런 게 어딨어요, 할머니. 거긴 띠 같은 거 없어요.”
“에고, 큰일이네, 거기서 노랑머리 만날 수도 있는데, 어쩐대. 원진살, 상충살은 꼭 피해야 되는데….”
먼 길 떠날 손녀에게 제일 먼저 드는 걱정이 혹시 모를 외국인 짝궁 걱정이다. 열 두 띠 인연의 운명설을 백 퍼센트 신봉한다. 김보리(쥐띠)가 범띠거나 토끼띠였으면 며느리로 안 들였을 듯. 손녀가 숙녀가 되자 쥐여주셨던 삐뚠 손글씨 메모는 운명에 대한 믿음이요, 자식에 대한 사랑이다. 그러나 실은 자식들은 그야말로 일도 귀 기울이지 않는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점, 죄송합니다. 걱정해주시는 마음만은 소중히 담아두고 있어요.
*띠 궁합 이외에 귓불의 모양과 운명의 상관관계에 유념한다. 귓불이 빼족하면 인생이 고달프다. 김보리는 귓불이 부처님 못지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