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순 도서관

by 김보리

손자 면접 특강

"예준아, 이건 할머니가 직접 경험한 비법이야. 잘 들어봐.

할머니가 감주를 10년 넘게 만들었거든? 할아버지가 좋아해서 여름마다 만들었어. 근데 10년쯤 되니까 날도 덥고 너어무 만들기가 싫은 거야. 그때 할머니가 예준이 생각을 했지. '아, 이건 내가 내 영감 줄라고 만드는 게 절대 아니다. 이건 내 손주 먹일라고 만드는 거다.'

그렇게 생각했더니, 감주 만드는 게 하나도 안 힘들고 신이 나는 거야. 얼른 만들어서 내 손주 맥여야지 생각하니까 힘이 안 들어. 와, 신기하다. 마음 따라서 다 바뀌는구나 생각했어-.

그러니까 예준이도, 면접 보러 갈 때, '아, 여긴 내가 이미 합격한 학교다. 나는 면접에 합격했고, 그냥 한 번 경험 삼아 또 면접 보러 온 거다' 이렇게 생각해봐. 그러면 여기 뱃속 아래부터 막 기분이 좋아져-. 그럼 웃음 나고 표정도 좋아지니까 면접도 잘 보겠지? 이건 진짜야. 할머니가 진짜로 경험한 거니까. 알았지, 예준아-??"

'일체유심조' 할머니 체득 버전이다. 할아버지, 의문의 일패라 할 수 있겠다.

주옥같은 명강의 덕인지, 손자는 그 학교에 떡 붙어 대학생이 되었다. 손자 학교 구경하러 놀러 간 날, 세상을 다 가진 것 같던 이을순의 얼굴. 더는 여한이 없다는 얼굴이었다.




을순 도서관

책은 위인전이 최고다. 그중에서도 정주영, 이병철, 김우중, 이명박 자서전이 세상 제일 재미있다. 어느 날 이을순이 '박원순' 책을 꼭 읽어보고 싶다고 하길래, 김보리는 깜짝 놀랐다. 오모나, 이게 웬일? 영웅의 범위가 넓어진 건가? 성장 제일주의에서 살짝 좌 편향 민주주의로 가치관을 바꾸신 건가? 당장 인근 중고서점으로 내달려 박원순 전 시장님의 책을 두세 권 시전하니, 집어치우란다.

며느리는 내 맘도 모르고, 눈치도 없구나. 박원순이 아니라, '박원숙'이라고, 박원숙.

탤런트 박원숙 님의 책을 원하신 거였다. 검색해 보니 두어 권의 책을 쓰셨다.

[맘 좋은 년은 시애비가 열둘] [열흘 운 년이 보름은 못 울어]

제목이 찰지다. 아쉽게도 절판 중이다. 마지못해 고르신 건, 링컨과 나폴레옹. 역시나 영웅기다.

김보리가 헌책방에서 주로 책을 산다고 하니 흐뭇한 눈치다. '책 삽니다' 코너를 유심히 본다.

“아가두 다 본 책은 여기다 팔어?”

꼭 팔았으면 하는 눈치. 사실, 김보리는 책을 다 끼고 삽니다.

정말 읽고 싶은 책은 이수영 님 자서전 [왜 KAIST에 기부했습니까?] 라는데 이 역시 어디서도 구할 수 없다. 세상에 책이 얼마나 많은데, 어찌 없는 것만 찾으실까. 역시나 여성 경영인의 성공담이자 미담이다. 확실한 책 취향이다.

[열흘 운 년....]은 어디 공립도서관에 있다던데, 며느리가 빌려다 줄지. 최근 다시 중고서점에 가서 ‘(청소년을 위한) 이기는 정주영, 지지 않는 이병철’을 샀고 김보리가 권한 여러 권의 책 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읽는 중이다.

책을 읽는 할머니라 다행이다. TV를 끄고 식탁에 마주 앉아 함께 책 읽는 가끔의 시간이 어쩌면 이을순과 김보리의 유일한 교집합 시간일지도 모르겠다. 놀아드리는 시간도, 보필하는 시간도 아닌 어른 대 어른, 사람 대 사람으로 대등하게 누리고픈 걸 누리는 시간이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책을 읽지 않는 시대에, 책이 제일 좋고 책 짓는 사람이고 싶은 김보리로서는 시어머니와 그런 시간을 공유할 수 있음이 기쁘다. 책을 읽으니 시간이 잘 간다며 ‘그래서 네가 그렇게 책을 많이 보는구나’ 이을순은 그제야 김보리에게 공감한다.

“책을 읽으면 돈 쓸 시간도 없어요.” 말하니, 며느리의 책이 갑자기 더 좋아진다. 책 읽는 할머니, 매력적이다. (근데 너무 속독이시던데. 막 대각선으로 읽어 내리는 것 같더라는)


* [왜 KAIST에 기부했습니까?] 이수영 저 / KAIST발전재단

혹시 이 책을 소장하고 계시다면 연락 바랍니다. 성심껏 답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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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순 은행

“내가 머리는 나쁜데 돈에 관해선 그렇게 기억을 잘 해~”

자주 하시는 말씀. 동의한다. 기억이란 게 이젠 다 손에 안 잡히고 아련하기만 한데 돈에 관한 기억만큼은 이을순에게 선명하다. 을순의 시어머니 돌아가신 일이 벌써 스무 해 가까이 돼 가는데 그때 받은 조의금을 빠짐없이 기억한다. 어쩌다 그 얘기가 나오면 자식들은 한 번 읊어보시라 장난삼아 청한다. 요즘으로 치면 랩이요, 옛날로 치면 만담하듯이 다이나믹하면서도 걸판지게 흘러나온다.

“김모모 십만 원, 이모모 오만 원, 문정동 언니 십만 원, 큰오빠 얼마 얼마, 작은오빠 얼마….”

그 많은 이들의 이름과 액수를 짝 맞춰 다 기억해내니 신기할 따름이다. 돈에 관한 에피소드는 그 외에도 여럿, 고스란히 머릿속에 남아있다. 억지로 외우는 게 아니고 저절로 그리된다. 돈 모르는 며느리 김보리에겐, 과히 능력자 중의 능력자다.

아들네가 주는 생활비는 통장을 두 개로 나눠서 관리한다. 하나는 진짜 생활 경비, 하나는 저축용. 모아둔다고 어디 그게 본인을 위해 쓰일까. 다 자식을 위하는 일이다. 아들은 계약 건이 있을 때마다 이을순에게 전화한다. 꼬박꼬박 보고한다. 요즘 그녀에겐 그것이 가장 큰 낙이다. 큰 웃음이 절로 난다.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 없다. 듣고만 마는 게 아니라 살뜰하게 적어둔다. 이따금 한 번씩 계약 내용을 외기도 한다. 그때 목소리가 우렁차다. 곧 큰돈 모이겠다고 너무 큰 기대를 하실까 봐 실은 계약액의 반만 말씀드리기도 하는데, 그건 잘 모르시는 듯.

달력에 빨간 동그라미 점을 찍어두기도 한다. 만 원 미만으로 돈 쓴 날의 기록이다. 억척스레 모아 아들네 빚 갚는 것을 도와주고 싶다. 영감이 사업할 때 시작된 빚이니, 같이 갚아주는 게 맞겠지. 을순 은행에 모인 돈은 그리 쓰일 때 가장 값지다.

며느리는 돈을 몰라 큰일이야. 승윤이가 제일 날 닮았어, 다행히.

현금만 쓴다. 아들 차나, 며느리 차나 차에 천 원짜리 몇 장이라도 좀 가지고 다니면 좋겠는데 말을 듣지 않는다. 주차 요금 천 원 이천 원도 다 카드 결제 된다고 말하지만 미덥지 않다. 현금을 쓰고 매일 가계부를 적으며 쓸 돈과 쓴 돈 사이의 계산을 정확히 맞추고. 천 원권, 만 원권을 꼬깃하게 접어 넣어 다니고, 지갑이 무거울 정도로 동전을 넣어 다니는 것이 여간 보기 답답한 게 아니지만, 카드 아니고 현금을 써야 절약하게 된다는 이을순의 말에는 김보리도 공감한다. 그러나 카드의 편리함에 이미 길들여져 있으니 어찌할 수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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