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순 테레비, 을순 오락실

by 김보리

을순 테레비

아들 며느리 집엔 이을순의 방이 따로 없으니 먹고, 자고, 놀고, 쉬고, 이을순은 마루 생활자다. 이번엔 며느리가 아예 두터운 매트리스를 내주어 잠자리가 더 편하다. 마루는 원래 김보리의 공간이었던지라 그녀의 고충이 없지 않다. 한 달 여의 시간이니 견딜 만은 하나, 아마도 시간이 길어지면 그때는 다른 방법을 마련해야 할 터.

마루 생활자 이을순은 눈 뜨고 눈 감을 때까지 대략 하루의 70프로 이상 TV를 켜놓는 것 같다. 적게 잡아도 60프로. 반대로 김보리는 프로야구 중계 외에는 TV를 거의 보지 않는 편이다. (김보리가 더 기이한 인물 같기도 하다.) 청력이 약한 어르신들 계신 집은 거반 그렇듯 볼륨은 언제나 하이 하이다. 인공와우수술을 했어도 여전히 듣기가 어려운 이을순은 하이하이에 하이를 하나 더 추가해야 한다. 실은 그것이 며느리 김보리에게는 가장 힘든 일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어디 방으로 쑥 들어가 지내는 것도 맘에 걸리는 일이다. 그럭저럭 적응해가는 중이다.


이을순이 아니면 몰랐을 일들, 여전히 TV엔 옛날이 가득하다. 그렇게나 많은 시대물들이 반복 방영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책 취향과 비슷하게도 그녀는 산업역군 영웅기를 좋아한다. 드라마 ‘영웅시대’는 고 정주영 회장의 일대기란다. 이을순에게 최고의 위인이다. 필적할 만한 인물로 고 이병철 회장이 있는데 ‘영웅시대’에는 두 인물이 함께 나온다. 차인표는 정주영이요, 전광렬은 이병철이다.

아침에도 저녁에도 ‘육 남매’가 거푸 방영되고 있을 줄을 이을순이 없다면 상상이나 했을까. 아니 왜 그걸, 다시 재방송을, 지금 이 시점에 하는 건가 싶지만. 낮에도 밤에도 열혈 시청하는 이을순을 보면 방송국에서도 다 타겟을 예측하고 내보내는 것이구나 가늠된다. “똑 사세요, 똑 사세요” 명대사를 남긴 장미희는 꼬질한 육 남매에 비해 너무 고와 어이없고, 어린 송혜교가 육 남매에 홀연 등장하니 놀랍다. 이을순이 보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닌 가난한 시절과 그 시절의 애틋한 사람들이다. TV 앞으로 밥상을 옮겨 넋 놓고 육 남매를 보는 열렬한 팬심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

장희빈. 아, 장희빈 어게인. 이미숙 - 전인화 - 김혜수 - 김태희 등으로 이어지는 장희빈의 계보를 김보리도 잘 알고 있다. 그 앞엔 김지미, 남정임, 윤여정 등이 있었다고 한다. 김보리의 아득한 기억에도 이미숙의 장희빈이 있다. 김보리 열 살 즈음의 일. 어린 눈에도 이미숙이 참 예쁘기도 예쁘면서 너무 독해서 미웠던 기억이 있는데. 그때 상상이나 했겠는가. 40 년의 시간이 흘러 그 장희빈을 다시 보고 있을 줄을. 이미숙은 여전히 이을순을 홀리고 있다. 장희빈 홀릭.

아울러 ‘야인시대’를 즐겨보고, 어느 날엔가는 ‘제3공화국’을 또 다른 어느 날엔가는 ‘제4공화국’을 열혈 시청하고 있다. ‘전원일기’도 자주 나온다. TV가 타임머신이다.

건강 프로 홀릭이다. 초 집중한다. 본인도 알아야 하고, 자식들에게도 알려줘야 하니 하나라도 놓치면 안 된다. 맹신하는 편이다. 배운 것은 잘 지키는 편이다. 뉴스도 꼭 봐야 한다. 애들은 뉴스를 안보는 것 같으니 다 보고 알려줘야 한다. 인터넷으로 본다는데 그래도 TV로 봐야 정확하지. 뉴스 중에도 제일 중요한 건 날씨. 아들 옷 든든히 갖춰 입게 하려면 절대 놓치면 안 된다.


마지막으로 트로트. 아, 트로트. 김보리에겐 고역의 트로트, 이을순에겐 천국의 트로트. 미스트로트가 대 히트를 치고 이을순 역시 송가인에 푹 빠져 있던 때에 김보리는 어렵게 티켓을 구해 미스트롯 콘서트를 보여드리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트로트가 김보리에게 웬수 같진 않았는데. 이후 트로트는 지금까지 남자 트로트 전성시대. 김보리로선 놀랍기만 하다. 종일 트로트가 흘러나온다. 본방에 재방에, 재방의 재방 재 재방. 드라마, 뉴스, 그 외 시간은 모두 트로트. 볼륨 업, 트로트로 집안을 도배하는 기분. 트로트가 공기 중에 둥둥 떠다니는 기분. 멈춰주세요, 얼마간이라도.

어디 이을순에게만 그럴까. 가요 프로의 변방 어디쯤이었던 트롯은 어느 때인가부터 메인이 되어 할머니들 기운을 돋우고 있다. 트롯 매니아가 할머니들뿐이겠느냐만 그만치 새로이 기 살아나고 흥 살아난 층이 또 있을까. 덕분에 어르신들 삶이 명랑해진다. 이을순은 정동원의 팬이다. 동원이 성장사를 (여러 번, 아주 여러 번) 들려줄 때마다 눈물을 찍는다. 마트에 가서 안 사던 캔 참치를 한 줄 사 오기도 했다. 동원 참치 모델은 동원이니까. 막걸리는 영탁 막걸리. 영탁이니까.


딸은 임영웅이 노래를 제일 잘 한다고 하던데, 그래도 동원이가 제일 좋아. 그다음이 영탁이. 동원이가 콘서트 하면 며느리가 꼭 보여준다고 하는데, 볼 수 있을지 모르겠네. 돈도 비싸고, 기운이 남아 있을지. 매느라, 넌 누가 제일 좋아?


저는 안 좋아요, 아무도 안 좋아요~! 근데 동원이가 부쩍 커서 청년이 다 됐네요. 동원이 콘서트는 꼭 보여드릴게요! 기운만 붙잡고 계셔요!




을순 오락실


오관 떼기

띠가 부부의 인연을 알려주고, 귓불이 인생의 복을 알려준다면.

하루의 운은 오관이 알려주지. 오관이 잘 떨어진 날은 좋은 일이 꼭 생겨.

추어탕을 먹거나, 아구찜을 먹거나. 며느리가 유니킬러에서 옷을 사주기도 하고.

오관은 하루도 안 빼고 매일 해야지. 그래야 좋은 일이 많이 생기니까.


고스톱

명절에 며느리랑 손녀가 고스돕을 치자는 거야. 아들은 방에 들어가 나와 보지도 않아. 나두 잘 못 치는데, 며느리 손녀는 더 못 치는 것 같네. 그래두 돈내기를 해야지 화투는.

어이쿠. 며느리가 다 땄네. 어구어구 모가지 허리 다리야. 이걸 어찌 밤새 쳐. 옛날에 영감이 고스돕 회장이었는데. 나는 오래는 못하겄다-.



피아노

“내 곁에 있어주- 내 곁에 있어주-- 할 말은 모두 이것 뿐이야-”

이 노래를 꼭 치고 싶어서, 피아노를 다시 배웠잖아. 옛-날에도 배운 적이 있긴 한데. 체르니 100 치다 말았나. 이젠 다 까먹었지, 뭐. ‘내 곁에 있어주’ 배우려고 같은 아파트 사는 선생님을 하나 붙였는데, 배우긴 잘 배웠어. 계속 더 배우려고 했는데 선생님이 그만 하재. 계속 해도 더 늘게 없으니 그른 거 같어. 그래두 이만큼 배운 게 어디야. ‘아리랑’이랑 ‘내 곁에 있어주’는 안 보고도 친다고.

“나는 네가 좋아서- 순한 양이 되었네--”


오락이라 할 만한 게 뭐, 따로 있을까. 취미와 취향을 가지고 나이 먹으면 참 좋을 것 같은데, 이을순 세대에선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나마 사는 데 여유가 좀 있어 피아노를 배우기도 했고 서예도 배운 적이 있다. 어느 학원을 가던 결석이란 없다. 이을순의 성실함과 꾸준함은 정말 칭찬할 만 하다. 코로나만 아니면 라인 댄스, 리카 댄스도 배우고 체조도 배우고 하련만. 집에 갇혀 살면서 별 취미가 없으니 사는 게 지루하다. 종일 TV를 켜놓고 사는 것도 때가 이러니 별 도리가 없다. 이제는 백세 시대. 이을순과 함께 하며 김보리는 육십 칠십 팔십을 생각하게 되고, 오락거리가 많은 삶을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아리랑’과 ‘내 곁에 있어주’는 정말, 굉장히 jazzy 하고, free 한데, 누구에게든 꼭 들려주고 싶다. 박자를 가지고 놀아요. (박치라고 쓸 순 없어서) 듣기 좋아요. 묘한 매력이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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