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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리 Sep 22. 2023

배움이 약이 된다는 건 이걸 통해 알았지 - 외국어 1

불량주부 김보리의 기웃기웃 문화수집기 2 - 영어, 독일어


영어


단어와 단어 사이, 눈물. 문장과 문장 사이, 통곡. 그런 경험이 있는가. 까마득한 옛 일이어도 여전히 또렷한, 도서관 열람실과 화장실을 오가던 불안한 걸음과 어깨를 들썩거리며 쏟아내던 어린 울음. 짝사랑도 사랑이라 하면 그것은 실연 중의 진한 실연이었다. 마주 앉은 적이 한 손에 꼽을 정도인 사람과 헤어진 일은 이별이 아니라 포기에 가깝겠지. 짝사랑의 과정을 아는 이가 없으니 아프다고 드러낼 곳도 없고, 지독한 통증을 느끼긴 하는데 어디 가서 아프다 해야 할지 몰라 도서관에 갔다(고 말하면 제정신이 아니라 하겠지). 정신을 붙잡아 둘 곳이 필요했다.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릴 필요가 있었다. 학과 공부를 등한시하고 학원 공부에 열 올리던 시절이었다. 전공인 철학은 낙제급, 영어는 수준급. ‘영어가 제일 쉬웠어요’라는 말은 비난을 유발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때는 그랬던 것을. 책으로 배운 영어라 문법과 독해를 적당히 잘하는 수준이었을 뿐 어딘가에 긴요하게 쓰일 만큼 대단히 잘한 것도 실은 아니다. 그저 정신을 붙잡아 두고 눈을 돌리기에 그만한 일이 없었다.      


열람실에 앉아 광폭하게 두어 시간 공부하고 십여 분 숨 돌릴 때에 눈물을 쏟아냈다. 변기에 쭈그리고 앉아 흑 흑, 엉 엉. 열공과 비애 사이를 두어 달 오가고 나니 토익 점수는 슬그머니 900을 넘어섰고 녀석은 슬그머니 기억 속에 무던한 얼굴로 자리 잡아갔다. 영어가 제일 쉬워서가 아니라 가장 익숙하고 가장 적성에 맞아서 몰입할 수 있었다(같은 말인가). 학교 교사는 아니어도 언제나 좋은 (과외 혹은 학원의) 영어 선생님이 될 수 있었고, 그것은 나의 천직과도 같은 업이었다. 그나마 그게 아니었다면 경제력 제로의 인간이 되었을 터.


녀석은 의사가 되었다고 들었다. ‘꼭 그렇게 무심히 나를 스쳤어야 했니’라고 묻고 싶은 마음은 오래 들러붙어 있기도 했지만 어두운 감정만은 아니었다. 실연에 영어를 약 삼아 시련을 건너가던 그때의 어린 나를 꼭 안아주고 싶다. 그 덕에 영어로 밥 벌어먹고 산다고, 너는 괜한 일을 한 게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 이후에도 때때로 어학 공부는 암울함을 덮어주는 좋은 도구가 되어주었다. 시련에 마주했을 때 나는 그렇게, 새 언어를 처방했다.   

 


       

독일어


독일어 학습기는 시간상 실연 퇴치용 영어 학습담보다 시간적으로 조금 앞선다. 대학교 1학년을 엉망으로 마쳤다. 대학도, 전공도 자발적 선택이 아니었다. 잘해보겠다는 의지도, 대학생활에 대한 기대도 없었기에 학교를 반도 안 가고서도 부끄러움조차 없었다. (내막을 알 리 없는 부모님께는 지금까지도 죄송하지만) 계속 그런 태도로 학교를 다닐 수는 없었다. 재수를 선언했다. 적성을 따라 어문 계열에 입학하겠노라, 그게 싫으시다면 정치외교과에 가서 내가 가진 능력 중에 개중 (그나마) 출중한 어학 실력을 십분 활용해 외교관이 되겠노라고, 간절히 설득했다. 부모님께는 큰일 날 소리였다. 오 남매의 막내, 위로 언니 셋 오빠 하나의 대학 재수 이력을 합하면 7수. 지독히도 가난하다 그나마 덜 가난해진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그 시점은 다섯 자식이 비로소 입시를 다 마치고 모두 무사히 대학에 안착한 시점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그 과정을 다시 겪고 싶어 하지 않으셨다. 게다가 나는 아버지가 원하던 대학에 정확히 착지해 있었으므로 무르고 싶어 하지 않으셨다.

단호함은 큰언니를 통해 전달되었다. 막내를 매정하게 대하기가 아버지도 쉽지 않으셨을 게다. 잠실의 ‘스페인’이라는 레스토랑에서 아침 열 시부터 오후 네 시까지, 언니는 나를 집요하게 설득했다. 될 때까지 설득하려니 여섯 시간에 달하는 긴 시간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울다 말다 또 울다 그쳤다, 언니는 결국 포기한 나를 백화점에 데려가 그 때도록 입어본 적 없는 비싼 옷을 사주었다. 모자가 달린 G 브랜드의 검정 캐주얼 점퍼를 오래 잘 입었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지금이나 그때나 참 순하기도 하다. 

“옷 따윈 필요 없어!”

소리치며 자리를 박차고 떠났더라면 살아온 날 중 가장 기 세고 야무진 모습으로 기억됐을 텐데. (비싼 옷 사준다는 회유에 끌려 재수를 포기했던 것은 절대 아니다)


그날 나는 노량진에 갔다. 실은 예정된 재수 메이트가 있었다. 나는 재수를, 그는 삼수를 준비 중이었다. 오해를 살까 봐 미리 해명하자면, 그가 있어 재수를 하려던 건 절대 아니었다. 삼수한다는 그를 따라 노량진에 가려던 것도 아니었다. 눈치 못 챌 까봐 먼저 얘기하자면 녀석이 바로 그 녀석이다. 영어 공부 패치를 장착하게 만든 그 녀석, 끝끝내 짝사랑으로 남은 녀석, 손에 꼽을 만큼 마주한 몇 번의 만남 중 한 번이 바로 그날, 재수를 포기하고 점퍼를 위문품으로 받아 든 날이었다. 물론 짝사랑이 그날 끝난 것은 아니었다. 겨우 몇 번을 더 만나며 외사랑을 이어가던 그 시간을 버티려는 고단한 마음과, 재수를 하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꺾인 후의 좌절, 그 후의 공허감을 극복하고자 새롭고 낯선 무언가를 찾아야만 했고, 그때에 난데없이 독일어가 등장했다.




왜 꼭 독일어여만 했을까. 재수를 포기한 채 마음을 잡지 못하고 2학년에 접어들었을 때, 역시나 새로운 무언가가 필요했다. 한 학기쯤 이런저런 고민을 이어가다 ‘이렇게 살 수는 없다, 유학이라도 가면 어떨까’ 그제야 좀 덜 가난해진 집 막내는 재수 결의만큼이나 단호한 유학 의지를 다지게 되었다. 평생 철학에 천착했던 재야 철학자와도 같던 아버지는 ‘네가 만약 철학을 공부하러 유학을 간다면 허락하겠노라’ 선언하셨고 철학 공부하러 감직한 독일이란 나라는 대학 교육이 무료라 하니 마다할 리 없었다. 그날부터 나는 독일어 학습에 접어들었다.

      

역시나 어학이 제일 쉬웠다. 맞춤한 적성이었다. 근 이년 반 동안 나는 훌륭한 독일어 학습자였다. 독일어 학원은 지금이나 그때나 흔치 않기에 수원에서 종로까지 새벽을 밟아 ‘인링구아(INLINGUA)’라는 이름의 학원에 다녔다. 학교는 여전히 결석이 잦았지만 학원은 하루도 놓치지 않았다. 개근생이자 우등생이었다. 신학도가 두엇 있었고, 음악을 전공하는 대학원생이 있었고, 공학도도 있었다. 모두 독일 유학을 준비 중이었다. 나와 같은 학교의 독일어 전공 학생들도 꽤 여럿 포진해 있었는데, 그들보다 내가 낫다는 칭찬도 여러 번 들었다. 우쭐.


낮은 저음이 잘 어울리던 독일어의 발음이 좋았고, 진중하고 묵직한 느낌의 지적인 강사들에게도 마음이 갔다. 게다가 독일은 고독한 천재 ‘전혜린’이 유학한 곳이 아닌가. 그녀의 에세이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그녀와 독일에 관한 환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호감이 높을수록 성실할 수 있었고 오래 지속할 수 있었다. 매일매일 긴 시간을 들여 독일어에 매진했다. 새롭고 낯선 것에 몰두하며 일상을 견고히 할 수 있었다. 


본질을 바로 잡는 것보다는 많이 쉬웠다. 몰입할 수 없는 학과 공부와 나태한 학교생활을 교정하는 데에만 집중했다면 끝끝내 나는 일상과 멘털을 바로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당장의 중심에서는 여전히 벗어나 있었지만, 내일의 중심과는 닿아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학교도 학과도 아버지의 선택이었고, 어리고 어리석어 주관이 없던 나는 별 고민 없이 입학을 했으나 나와 맞지 않았다. 살아온 날 중 가장 큰 힘을 모아 재수를 결심했으나 그 또한 맥없이 포기한 후였으니 무너질 수도 있는 시절이었다. 공부가 날 살렸다고 하면 과장일까. 싫어하는 공부는 독이 될 수도 있겠다만, 좋아하는 공부는 낙이 된다. ‘공부’라 말하면 무겁게 느껴지지만 취미와 적성이라고 생각하면 가벼워진다. 집중할 만한 취미를 찾는 일은 고비를 넘기는 데 도움이 된다. 일상을 견고히 붙잡아주는 삶의 접착제와도 같은 것. 물론 그게 꼭 어학일 필요는 없지만. 



그렇게 몰입했던 일이 지금 이렇게 아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은 아쉽다. 몸으로 익힌 일은 어디엔가 남아있기 마련인데, 평소 접하지 못한 어학은 물로 씻어낸 듯 사라진다. 이히 리베 디히 (I LOVE YOU), 구텐 탁(GOOD AFTERNOON), 구텐 모르겐(GOOD MORNING), 당케 쉔 (THANK YOU) 정도만 겨우 남아있는 나의 나머지 독일어는 어디로 흩어졌을까. 


독문과생 능가하게 독일어를 잘하던 그녀가 독일에 유학 가지 못한 상황은 대기업에 덜컥 취업당한(?) 데에 이유가 있다. 역시나 귀가 얇아 시도나 해보라는 가족의 조언에 솔깃해 입사시험을 봤고, 이왕 합격한 거 직장생활도 경험하고 돈도 조금 모아가면 어떻겠냐는 충고를 따랐다. 가정 형편도 여전히 넉넉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취업해 고작 1년여의 직장생활을 하다 인연을 만나 결혼을 하고 오늘까지 가정을 이루어 살고 있으니, 인생 참, 어려운 듯 쉽게 살았지 싶다. 해피엔딩인지는 아직 알 수 없으나 삶은 적당히 수월했고, 고작 1년간의 직장 생활을 함께 한 입사 동기들과도 아직껏 우정을 이어오고 있으니 이만하면 나쁘지 않다.  


독일어를 공부하며 일상을 버티고 짝사랑도 견디는 시절을 이어가다 어느 순간 녀석이 훌쩍 다른 세계로 건너가 버렸고, 그때엔 영어로 버텼다. 삼수에 성공한 녀석은 의대생이 되었고, 나와의 연은 저절로 끊겼다. 재수생과 삼수생이 짝을 이루어 성공적으로 결승점에 함께 닿았더라면 그 인연은 달라졌을까. 달라졌다면 내 인생은 지금과 얼마나 달라졌을까. 그때에도 자기를 잃지 않고 살아낸 오십 중년이 되어 있을까. 영어도 독일어도 상처를 보듬는 연고나 밴드 정도의 역할을 했을 뿐, 나를 살리고 죽이는 그 무엇은 아니었다. 그것이 있어 그때의 상흔은 그때 아물어 지금은 자국을 찾을 수 없다. 이제 스페인어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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