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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리 Sep 24. 2023

배움이 약이 된다는 건 이걸 통해 알았지 - 외국어 2

불량주부 김보리의 기웃기웃 문화수집기 3 - 스페인어

아버지를 잃은 일은 엄마가 떠난 일보다 십 년쯤이나 후의 일인데, 나이와 함께 의연해질 법도 하련만 열 살이나 더 먹은 나는 졸지에 고아가 된 사춘기 아이처럼 아팠다. 마음을 닫고 두 달여간 나를 가두었다. 사랑 많고 마음 넉넉하던 나였으나 그때에 나는 딸기 한 박스를 건네려던 친구에게도, 케이크 상자를 들고 온 이웃에게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다정한 이들이 현관 앞에 두고 간 따뜻한 위로의 물품을 슬며시 안으로 들일 땐 완고하게 문을 닫아두었을 때보다 더 큰 설움이 밀려왔다.


삼십 중반이 되었어도 애틋하게 엄마를 보내던 더 어리던 날보다 상실감은 훨씬 더 크고 깊었다. 두 발은 땅에서 떨어져 허우적거리고, 감정은 바닥으로 끝도 없이 가라앉았다. 지구 밖까지 떠올라버려도, 지구 중심으로 사라져 버려도 나 하나라면 그만이겠으나 엄마이고 아내니까, 가정의 중심 축이니까 어떻게든 일상으로 돌아와야 했다. 버텨낼 동아줄을 찾아야 할 때 그것이 언어인 경우는, 이번이 세 번째. 난데없이 스페인어가 등장한다. 역시나 같은 이유, 새롭고 낯설어 혼을 빼놓을 것. ‘어?’ 하다가 ‘아!’ 하다가 ‘이야!’ 하게 할 것. 새로워서 재미있을 것. 재미가 슬픔을 삼킬 것. 그때에도 나는 유사한 셀프 처방을 냈다. 외국어를 시작하세요, 지금, 당장!




독일어 학원만큼은 아녀도 스페인어 학원 역시 가까이에서 찾기는 힘들었다. 개인 과외보다는 체계적인 곳에서 규칙적으로 배우겠다고 대학교 평생교육원을 겨우 찾아 등록했다. 클래스 구성은 선생님 한 명, 학생 한 명. 수강생 모집이 되지 않아 A, B 나뉘어 다이아로그를 주고받을 급우 하나 없었다. 선생님도 학생도 재미있을 리 없는 상황이었지만 뒤늦게 모범생이 된 나는 한 학기를 결석 없이 겨우 마쳤다(선생님은 아침마다 나의 결석을 기대하셨을 수도).


엄숙한 선생님과 일대일 맞춤 수업을 한다는 것은 어렵고 불편했지만 그런 중에도 스페인어의 매력은 금세 드러났다. 영어와 어원, 어근이 비슷한 단어가 많아 따로 암기하지 않아도 어휘력이 쉬이 늘었고, 문장 구조도 심플했으며, 무엇보다 감탄문과 의문문의 서두에 느낌표와 물음표를 거꾸로 뒤집어 표기(¡, ¿)하는 것은 너무나 신선했다. 이 대목에서 ‘이렇게 깜찍하다니’라고 생각한 사람은 나뿐일까(평서문과 의문문의 어순이 유사해 문두에 문장부호를 표기한다는 유래가 있다).    


모음 a, e, I, o, u가 ‘아, 에, 이, 오, 우’로 일관성 있게 발음되니 처음 보는 단어도 쉽게 읽어낼 수 있다. 모음의 조합에 따라, 혹은 같은 모음이어도 다르게 발음하는 영어에 비하면 초보가 접근하기에 이보다 쉬울 수가 없겠다. 예를 들면 ‘cerveza'를 '세르베싸'라고 바로 읽을 수 있는 그런 일. ’Yo quiero ganar dinero por tomar cerveza.'라는 문장을 ‘요 끼에로 가나르 디네로 뽀르 또마르 세르베싸’ (나는 맥주를 마시기 위해 돈을 벌고 싶어요)라고 쉽게 읽고 해석하는 일. 그런 일이 불과 학습 시작 며칠 만에 가능한 언어. 왕초보 과정에 접속사와 관계대명사가 등장하는 언어. 영어만 적당히 학습해 두었다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언어가 스페인어이며 세계에서 세 번째로 많이 쓰이는 언어임을 알면 실용의 도구, 여행의 도구로서도 접해볼 필요가 있는 언어다(영어에 이어 많이 쓰이는 언어인 중국어는 중국 인구가 12억에 육박하기에 그런 것이라 치면 많은 나라에서 쓰이는 스페인어의 위력은 더 크게 느껴진다).




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이루어진 고아 설움 퇴치용 스페인어 학습은 그리 오랜 역할은 하지 못했다. 일상이 한결 편안해진 후 아이들 키우며 어영부영 살다가 7년쯤 지나서였을까. 스페인어가 다시 돌아왔다. 가장 가까운 친구를 잃고 나서 여행작가학교와 함께 다시 시작했던 게 ‘시원스쿨’ 스페인어 왕초보 과정이었다. 


걸쭉한 경상도 사투리의 Yessi(예씨) 선생님은 언제고 한 번 만나서 CERVEZA(맥주) 한 잔 사드리고 싶을 만큼 시원시원하고 화통한 온라인 스페인어 선생님이었다. ‘무이 비엥 (Muy Bien)을 시시 때때로 문두에, 문미에, 문장 사이에 툭툭 던져 넣던 예씨 쌤은 그야말로 Muy Bien, Very Good, 너무 좋아요. 나의 부추김에 시원스쿨 스페인어 과정을 시작했던 지인도 몇 있다. 그들과 다 같이 예씨 쌤 모시고 tomar cerveza (맥주를 마시다) 했으면 참 좋았으련만. (실제로 그런 기대를 하기도 했다니까) 그런 일도 없었고, 나의 스페인어 학습기는 이런저런 이유로 멈추는 일이 허다했으며 지금까지도 왕초보 과정에 머물러 있지만 여전히 진한 미련으로 남아있다.

 

스페인어 어학연수는 각 나라의 물가를 고려할 때 스페인은 못 가도 중남미 쪽으로는 갈 만하다고 들었다. 멕시코나 과테말라, 페루 정도. 다시 배움을 재개한다면 그것은 남미에서, '예씨' 쌤 말고 근사한 중남미 미남 선생님과 함께라면 더 좋겠다. 여전히 나는 스페인어에 집착 중. 스페인어는 나에게 여전히 진행 중.      





시련이 부르는 어학 공부. 그런 일이 앞으로도 또 있을까. 시련이 없는 삶이라면 더 좋겠지만 시련이 가로막을 때 그렇게라도 넘어서려는 의지가 남아있어 세월의 속도를 앞질러 늙어가거나 낡아지지 않는다면 좋겠다. 그때엔 무슨 언어가 홀연 등장할까. 최고급 난이도의 환란이라면 외계어를 공부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응 쓰르 바따르 아르 오타르 마나할. 그냥 지껄인 말 입니다만.......     


*스페인어 어학연수를 위해 이것저것 알아보던 중이었는데, 지금 나는 또 다른 제4의 외국어를 배우고 있다. 그리고 나는 곧 그 언어를 공부하러 현지로 건너가 최소 3개월 간 머물 것이다. 예전에는 현실화될 때까지 웬만하면 계획을 숨기고 살았다만, 지금은 말에도 힘이 있다고 믿어 부러 소문을 낸다. 요즘 새로이 푹 빠져 있는 새 언어 학습기는 조금 나중에 소개할 예정. 여전히 나는, 언어가 제일 쉽고 즐거운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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