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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리 Sep 26. 2023

밤에 쓴 글은 밤에 읽혀야 한다

김보리 주사집  프롤로그 - 앞으로 주사가 쏟아질 예정입니다

밤이면 솔직해진다. 클렌징 오일로 화장기를 닦아내듯 몇 줄의 글로 허세와 위장, 가식과 위선을 털어낸다. 감정은 누드가 된다. 알코올이 거든다. 턱밑까지 감싸던 긴장이 비로소 풀린다. 말이 풀린다. 스멀스멀 언어가 기어 나온다. 좌뇌 우뇌 구분 없이 머릿속이 흐트러지고, 실없이 풀리던 눈엔 이 세상 것이 아닌 것 같은 아득한 기운이 번진다. 다른 세상의 언어를 길어 올린다. 애쓰지 않아도 쉬이 흘러나와 기꺼이 모아지는 언어. 밤에는 영감(靈感)이라 여기던 그것이 낮의 언어로는 주사(酒邪)에 가까움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밤의 글이 낮의 글이 된다 생각하면 쓰던 중에도 부끄러워진다. SNS상에서 ‘친구’와 ‘이웃’으로 연결된 낯선 타인에게는 부끄럽지 않다. SNS 친구이면서 현실에서도 친구인 진짜 친구와 진짜 이웃, 지인에겐 민낯이 부끄럽다. 일상의 나와 취중의 나 사이의 현격한 갭을 들키고 싶지 않다. 발가벗겨지고 싶지 않다. 가식으로 그들을 대해왔던 걸까. 배려라고 해두자. 혹이나 근심이 될까 싶어 속을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보이는 것보다 건강하지 못한 마음이 있다. 고이고 흐르지 않아 곪아버린 마음이 있다. 우울증이라 규정되기 전의 불량(不良)한 -품질이나 상태가 좋지 않은- 마음이라고 정리했다. 밤의 글 몇 줄로 정체된 불량심(不良心)을 쏟아내곤 한다. 많은 이가 읽을 필요는 없다. ‘좋아요’가 두세 개쯤 되면 SNS의 글을 ‘나만 보기’로 전환해 버린다. 그걸로 족하다. ‘누군가는 내 마음을 알고 있다’는 그 정도의 위안.




글의 말미에 한 줄을 더한다.

‘이 글은 곧 닫힙니다.’ 

닫힐 글이라 진솔할 수 있었다. 닫아놓은 글이 뒤늦게 꿈쩍이고 있다. 한때의 영감 혹은 주사는 닫힌 상태로 위세를 잃어 누가 본다고 해도 그리 민망하지 않은 글이 되었다. 하나씩 꺼내서 한 곳에 모아 본다면 그것은 바로 '김보리 주사집'.


그때의 절박하던 마음, 보드랍던 마음, 거친 마음, 달던 마음, 쓰던 마음, 때론 먼지 같고 때론 무겁던 진짜 중의 진짜 마음. 유효기간이 고작 일이십 분이던 허망한 글에 긴 시간을 준다. 밤의 글은 밤에 읽혀야 한다. 밤에만 감지되는 진짜의 마음이다. 김보리 주사집 혹은 밤의 고백록. 꼭 밤에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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