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보리 Oct 14. 2024

리본 장인

‘1일 1 분실의 삶을 실천하며 살고 있다’고 자주 너스레를 떨 만큼 물건을 잘 흘리고 다닌다.

꼭 나이 먹어서 그런 것만은 아닌 게, 건망증과 칠칠찮음의 역사가 꽤 길다.

어려서부터 집에서 무어든 안 보이면, 막내가 어딘가에 흘리고 왔거니. 가족 모두 으레 짐작했다.

‘쟤가 어려서 연탄가스를 맡아서 저 모양’이라고 말하며, 다들 그러려니 해주었다.

그럼에도 내 새끼 안 잃어버리고, 차도 잃어버린 적 없으며(차 키는 몇 번 있고)

집도 잘 찾아가고, 지갑은 수시로 흘리고 와도 번번이 돌아오는 아름다운 나라에 살고 있어 다행이다.

   

분실이 잦다 보니 비싼 물건을 잘 쓰지 않는다.

물건에 크게 애착을 가지는 편도 아니라, 잃어버리고 나선 금세 잊곤 하는데.

며칠 전 핸드폰 충전기와 이어폰을 차례로 흘리고 와서는 이상하게 애가 달았다.

지방 모텔에 흘리고 온 충전기는 택배로 받고 싶었으나, 보낼 틈이 없다 하시기에

택배 기사님을 직접 보내려 하던 중 마침 그 지역에 가는 친구가 있어 들려서 받아 오기를 청했다.


이어폰은 어디에 흘렸는지 알 길이 없었다.

값비싼 블루투스 이어폰도 아닌, 음질도 그저 그런 평범한 줄 이어폰일 뿐인데 어떻게든 찾고 싶었다.

이동 동선 내의 식당, 카페, 친구 사무실 등을 추적하던 끝에 결국 내 가방 구석에서 찾아냈다.

예전 같으면 충전기도, 이어폰도 또 다른 싸구려로 대체하고 말았을 텐데, 내내 머릿속에 맴돌았다. 곰곰 생각해 보니, 측두엽의 해마를 톡톡 건드리며 자꾸 떠오르게 하던 무언가가 분명 있었다.

리본. 물건에 리본을 매 둔 것이다.

내가 찾고 싶었던 것은, 물건이 아니라 리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정확히 말하면 리본이라 할 수는 없다.

꼬이는 줄을 정리하는 줄감개라고 해야 할까, 줄 홀더라고 해야 할까.

방콕 여행 중 방콕아트문화센터(BACC)를 둘러보다가

젊은 가죽 공예가에게서 가죽 줄감개를 열댓 개 정도 사 왔다.

돌아와서 지인들을 만나는 대로 차례로 건네기도 하고

나 역시 노트북 줄감개와 충전기, 이어폰 줄감개로 잘 쓰고 있다.

작은 거 200원, 큰 거 400원 정도.

착한 가격에 가죽 질감도 좋고, 리본으로 묶은 듯 태도 예쁘다.

게다가 이 작은 물건은 그날, BACC에서의 추억을 그대로 담고 있지 않은가.


기대 이상의 아름다운 실내와 기대 이하로 저렴하던 쌀국수.

때맞춰 오픈하던 사진전 덕에 감각적이고 세련된 방콕 예술인 구경도 실컷 하고.

카페에서 멍 때리다 짐톰슨 뮤지엄을 결국 가지 못했던 기억과

잘생긴 젊은 가죽 장인 주위를 맴돌다 비싼 건 못 사고 줄감개나 줄줄줄 몇 개 사 오며

농담 따먹기 하던 실없는 시간들.

줄감개는 그날을 묶어둔 리본일 지도 모른다.

그냥 분실물이 아닌, 리본이 묶인 분실물.

나의 애착은 아마도 그런 데서 왔을 것이다.

리본을 매어둠으로써 그냥 충전기가 나만의 충전기가 되고

아무 이어폰이 나만의 이어폰이 되었다고나 할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것에 비유한다면 지나친 과장이겠지만 리본을 묶어주는 일은 ‘아무 무엇’에서 ‘나의 무엇’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사람과 사람이 인연을 쌓아가는 것도 서로가 서로에게 리본을 묶어주는 일이라 말하면

이 역시 지나친 비약이려나.


처음의 설렘으로 리본 하나를 묶고

세월을 건너며 배려와 다정을 쌓을 때마다 하나씩 하나씩

서로의 마음에 리본을 묶어주는 일.

그러면서 ‘아무나’인 사람이 ‘나의’ 사람이 되어 가고

아무 날이 특별한 우리의 날이 되어가는 것.


그리움에 마음이 일렁이는 날은 묶어 둔 리본이 마음속에서

(단편소설 ‘노란 손수건’의) 참나무에 매달린 노란 손수건처럼 바람에 나부끼고 있는 것이라고

어쭙잖은 시를 마음에 지어본다.      


인연 하나가 저물어 간다.

무수히 많은 리본을 하나씩 풀어내야 할 때.

꽤 오랜 날이 걸리고, 꽤 자주 마음이 서늘해질 것이다.

무심히 걸어둔 줄감개 하나에도 이렇게 연연하는 사람이니

수시로 측두엽의 해마가 움찔대겠지.

잘 정리해서 묶어둔 핸드폰 줄 줄감개 리본과 달리 엉뚱하게 묶어두어 풀기 어려운 리본도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그런 이유로 얼키설키 꼬인 인연이 돼버린 건지도.


묶어온 시간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리본을 묶는다는 건, 인연을 엮어간다는 건 나를 데우는 일이었고 성장하는 일이었다.

리본을 푸는 과정도 그러하리라.

견디며 성장할 것이고, 풀어가는 시간만큼 단단해질 것이다.

푼 자리에 다른 리본을 매며 다시 따스해질 것이다.   

  

가을이다. 짧아서 아름다운 계절.

리본을 묶기도, 풀기도 좋은 계절.

이번 가을은 더욱 특별하게 마음에 담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많은 리본을 묶어둔 사람(딸)과 하루를 함께 한다.

나는 어쩌면 리본 장인이라고, 나를 위로하며, 잘 살아내련다.

오늘도 enjoy fall vibe~.


작가의 이전글 서울 사람이 되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