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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로 Jan 19. 2016

《당신에게 몽골을》::열네 번째 기록::

이름 없는 당신을 위하여

열네 번째 기록 - 탱기스 영화관


  내가 머물고 있는 곳은 한국 수녀님들께서 운영하시는 종합복지관 형태의 교육기관으로 몽골 내(內) 자선 단체이다. 약 10년 전쯤 한국의 수녀님 몇 분께서 몽골로 오셔서 이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몽골인 직원도 몇 분 계신다. 지인을 통해서 알게 된 센터였는데 몽골에 오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간절하여서 연고도 없이 무작정 연락을 드렸었다. 센터에 머물면서 교육 봉사도 하고 도움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전했고 수녀님들의 넓은 아량 덕분에 기숙사에 머물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막상 와 보니 기숙사에 있었던 몽골 친구들은 방학을 맞아 각자 시골로 돌아가고 아무도 없었다. 보통 날씨가 몹시 추운 겨울날에 모여 공부를 많이 하고 여름철에는 고향에 가거나 휴가를 떠난다고 했다. 아쉽지만 다음 주에 대학생 봉사단체로 센터에 방문하는 친구들과 함께 일을 하기로 했다.

  내 방은 원래 서재로 쓰던 공간이라 다른 방과 다르게 책장이 많다. 내가 오는 때에 맞춰 방으로 만드셨다고 한다. 쇠창살이 쳐진 창가 밑에 침대가 놓여있고 카펫이 깔려있다. 창문이 크게 나있어 따스한 햇살이 침대 머리맡까지 닿는다. 창밖으로 들려오는 아이들의 재잘대는 소리가 참 정겹게 느껴진다. 내 방은 인터넷이 터지지 않는 터라 할 게 없다. 덕분에 책을 읽고 글을 쓰는데 내 시간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그러고 보면 한국에서의 나는 정신이 많이 팔려있었던 것 같다. 이것저것, 주된 것 없이 인연 맺음에 헤펐던 것 같다. 그래서 이렇게 나 자신과 온전히 마주할 수 있는 지금이 너무 좋다. 그리고 내 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 감기도 오롯이 맞이해서 내 몸이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신경을 쓸 수 있어서 참 좋다.

  또 좋은 것은 ‘나 다움’, ‘하니 답다’가 없어서 참 좋다. 딸이라서 딸이 해야 하는 의무, 하니라서 하니만큼 해야 하는 것들, 그런 게 없어서 좋다. 나를 아는 사람도 없고 나한테 기대하는 사람도 없어서 참 가볍다. 아무것도 되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얻은 것 같다. 

  어치르 씨를 통해서 아노라는 몽골 친구를 소개받았다. 어치르 씨는 몽골 대학교 한국어과 강사이고, 아노는 그의 학생이라 한국어도 유창하게 구사했다. 아노가 시내 구경을 시켜준다고 해서 길을 나섰다. 시내에 있는 박물관 몇 군데를 들리고 공원도 들렸다. 그리고 탱기스 영화관에 들렸는데 몽골 영화와 몇몇 외국 영화가 상영되고 있었다. 몽골에서 이런 걸 누릴 수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누군가는 길거리에 널브러져 있고 누군가는 고급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고 영화를 보는 것이 생경하게 느껴진다. 

  내 또래 친구와 다니니 조금 더 재밌었다. 게다가 한국어로 편하게 이야기 나눌 수 있어서 더 좋았다. 아노와 한국 프랜차이즈 치킨 집에서 점심을 먹고 스케이트 보드를 타러 갔다. 

  몽골의 여름은 해가 너무 길어서 하루에 이틀을 사는 기분이 든다. 그만큼 지치기도 빨리 지치지만 저녁 9시가 되도록 환한 탓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게 된다. 그래서 그런지 바깥에서 노는 아이들 소리도 끊이지 않고 들린다.

  다시는 그리워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이 저녁에, 이 고요함 속에서 스멀스멀 옛 생각이 떠오른다. 이런 때는 정말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밝은 빛으로 가득했던 하늘이 어둠으로 번져갈 때, 기어코 빛을 밀어내고 어둠이 자리할 때면 이상하게 옛 생각이 밀려와 나를 덮친다. 밤늦도록 그리움의 덫에 사로잡혀 있다가 뒤늦게 잠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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