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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로 Nov 09. 2015

《당신에게 몽골을》 ::네 번째 기록::

이름 없는 당신을 위하여

네 번째 기록 - 승리의 여신


  늦게 잠들었어도 눈이 번쩍 뜨였다. 센터에 있는 동안은 수녀님과 함께 새벽기도를 나가기로 했기 때문에 늑장을 부릴 수가 없었다. 울란바토르에서의 새벽 7시, 낯설지 않은 새벽 공기를 가로질러 미사를 보러 갔다.

  공간 자체가 몽환적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꼭 맞잡았는데 눈물이 차올랐다. 가슴 언저리부터 먹먹해지더니 이내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그리고는 다음 한 마디가 계속해서 떠올랐다. ‘감사합니다, 몽골에 무사히 오게 해주심에 감사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러 오게 해주심에 감사합니다…….’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고 뜨거운 눈물이 내 두 뺨을 적셨다. 비집고 나오는 숨을 길게 내쉬었는데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다. 눈이 스르르 감겼고 다시 한 번 깊은 숨을 내쉬었다.

  수녀님과 함께 아침 식사를 했다. 뭔가 새로 태어나 새로운 것을 먹는 것만 같은 성스러움이 느껴졌다. 이렇게 맛난 밥도 주시고 잘 자리도 봐주셨는데 받는 게 너무 많아서 마음이 불편했다. 그래서 밥을 먹고 나서 수녀원 복도를 열심히 쓸고 닦았다. 땀을 내는 기분이 정말 상쾌했다. 수녀원 체험이 덤인지, 몽골 여행이 덤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오늘은 몽골 전통 축제 기간이라 센터 직원이 출근하지 않았다. 몽골의 나담(Naadam)은 매년 7월 11일부터 13일까지 3일간 열리는 축제로 국가 휴일로 지정되어 있으며 씨름, 경마, 활쏘기까지 총 세 가지 경기를 한다. 독립선언일을 기념하기 위함인데 수도 뿐만 아니라 시골 곳곳에서도 경기를 한다고 한다. 몽골에 오기 전에도 잠깐 들었었는데 그 표가 비싸고 인기도 많아서 미리 사지 않으면 구할 수가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고 그냥 바깥 구경도 할 겸 센터를 나섰다.  

  책도 없고 지도도 없었다. 그냥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 하염없이 걸었다. 차에서 봤던 풍경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몽골어까지 생소하니 그야말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이었다. 가면서도 긴가민가했는데 저 멀리서 걸어오는 부자(父子)의 모습을 보고 나담 경기장에 가는 길임을 확신했다. 아들은 아버지가 끄는 말에 올라타 마치 왕자라도 된 마냥 기세등등한 모습을 보였다.

  또 조금 가다가 초록색 조끼를 입은 무리를 발견했다. 생김새를 보아하니 나의 동포 한국인이 틀림없었다. 나는 경기장에 가는 길이냐며 말을 붙였고 봉사를 하러 몽골에 왔다는 초록 무리와 함께 길을 걸으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한참을 걸어 나담 경기장에 도착했다. 길거리에 파라솔을 친 노점상들이 줄을 이었고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어렸을 적에 엄마, 아빠 손을 잡고 갔던 어린이대공원이 떠올랐다. 이제 막 개소식을 하는 소리가 들려와서 마음이 급해졌다. 입구를 찾아 앞에 서 있는 경찰을 붙잡고 영어로 말을 붙였다. 일 년에 단 한 번뿐인 축제에다가 내 인생에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르는데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몇 마디 했고, 그 경찰은 동료 경찰에게 뭐라고 하더니 표도 없는 나를 들였다. 혹자는 행운의 여신은 조금 더 간절한 사람에게 온다고 했더랬지! 들어가기 어렵다던 나담 경기장에 표도 없이 입장하게 되었다. 승리의 여신이 함께 있는 것만 같았다.

  몽골 전통 춤이 정말 매력적이었다. 힘을 뺀 채 덩실덩실~ 어깨를 움직이는 춤사위가 내 스타일이다. 내가 몽골에 꽂힌 이유는 내 몸에 몽골인의 피가 흐르고 있어서였을까. 오늘이 몽골에 온지 이틀째인데 본고장에 온 것만 같았다. 

  또한 몽골 전통 노래법이 인상 깊었다. 목 깊은 곳에서부터 나는 울림이 예사가 아니다. 걸걸한 소리가 심장 박동 소리만 같았다. 할아버지가 술 한 잔 걸치고 주정 부리는 소리 같기도 했지만 아무튼 신기한 노래 법이었다. 전통 레슬링은 말해서 뭐하랴! 몽골 레슬러들은 한국에 비해 훨씬 덩치가 큰 것 같다. 쨉이 안 될 정도다. 기골이 장대하고 거칠고 날 것 그대로다. 오, 이 나라, 정말 멋지다!

  나담 경기장까지 무사히 통과하고 나니 이건 뭐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원하면 이루어지는 세상! 내가 꿈꾸는 세상이 도래해 나는 한참 취해있었다. 

  때마침 인천공항에서 만났던 어치르 씨의 연락이 왔다. 조금 수상쩍긴 했지만 나의 승리의 여신을 믿어보기로 했다. 뭐, 아니면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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