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으로 낭만을 말하는 영화

<미망> (김태양, 2023)

by 홍석

인스타그램 웹진 '시네마토그래프'에 투고한 글입니다.

※ 스포일러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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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다양한 언어로 말한다. 어떤 영화는 배우의 대사로, 어떤 영화는 음악으로 말한다. 그리고 여기 공간으로 말하는 영화가 있다.


<미망>은 세 개의 단편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이어 붙인 작품이다. 1부와 2부는 각각 별개의 제목으로 영화제에서 공개되었고, 판데믹 이후에 촬영한 3부까지 합쳐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 되었다. 그러니 영화 안의 에피소드 사이에 시간이 흐른 것처럼, 영화 밖에서도 1부와 3부 사이에는 약 4년의 간격이 있는 셈이다. 영화를 보기 전 홍보물에서 “<비포 시리즈>에 대한 한국의 답장”이라는 평을 보았다. <비포 시리즈>의 주인공들이 시간을 두고 서로 다른 도시에서 재회하는 한편, <미망>의 인물들은 같은 공간을 맴돈다. 변하지 않는 배경 위로 사람들을 그리고 지워보는 이 영화는 바로 그 공간을 다루고자 한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계속해서 ‘쉽게 사라지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해 언급한다. 광화문 광장의 이순신 동상은 위치를 옮긴다는 소문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를 지킨다. 학생 시절 자주 찾던 술집은 여전히 같은 장소에 있다. 도시의 거리는 조선시대 사람들이 밟던 땅 위에 있다. 외형과 그 위를 다니는 사람들이 변할지라도 도시의 속성은 변하지 않는다. 2부의 남자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들을 따라가야 한다고 말한다. 변하지 않는 속성은 공간을 맴도는 이들에게 일종의 이정표가 된다.


미망1.png 영화 <미망> 스틸컷

초당 24장의 사진을 연속해서 보여주는 영화는 사라진 것들의 잔상을 보는 예술이다. 이는 외형이 계속해서 변할지라도 같은 속성을 유지하는 도시와 같다. 2부에서 스크린과 겹쳐 보이는 영사기 앞 여자의 형상은 계속해서 도시를 거닐게 될 그녀의 모습을 암시한다. 도시를 만들고 경험하는 인간들은 그 공간에 계속해서 머무른다. 한편 <미망>에서는 도시 역시 꾸준히 인간의 삶에 틈입한다. 차와 구조물은 사람들을 계속해서 가리고, 창문이나 유리에 비춰 보이는 도시의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화면에 등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시와 인간을 계속해서 겹쳐 나가는 이 영화가 배제하고 있는 것에도 주목해 보자.


스마트폰이 대중화된 이후로, 많은 이들은 영화에서 그것을 어떻게 다룰지 고민해 왔다. <미망>의 세계는 의도적으로 스마트폰의 능력을 배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모바일 지도 앱으로 순식간에 길을 찾을 수 있는 시대에 그러한 장면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전시가 열리는 갤러리를 찾는 장면, 버스나 지하철 노선도를 검색해 보는 장면 역시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등장인물들은 도시를 맴돌며 헤매기를 선택한다. 현대인들은 더 이상 헤매지 않아도 길을 찾을 수 있다. 모두가 초소형 휴대용 컴퓨터를 들고 다니는 현실에서는 <미망>의 아름다움이 성립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낭만의 세계가 기술의 배제를 통해서만 작동할 수 있다는 사실은 다소 씁쓸하게 다가온다.


미망4.jpg 영화 <미망> 스틸컷

그래서일까. 영화에서 통화 장면은 일상 속의 변곡점이 된다. 1부와 2부에서는 사람과의 만남이 전화를 방해하는 한편, 3부에서는 전화가 사람과의 만남을 방해한다. 번호를 바꾸는 행위는 주변 사람들을 정리하는 것으로 치환된다. 2부에서 여자는 조카와 화상 통화를 한다. 조카와 대화를 나누는 여자는 이 영화 전체에서 가장 행복해 보인다. 화상 통화는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을 같은 공간에 있는 것처럼 만든다. 3부의 후반부, 남자는 술집 안에서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고 여자는 밖에서 전화를 받는다. 카메라는 그들의 얼굴을 번갈아 클로즈업하면서 두 사람의 시선을 일치시킨다. 영화의 사운드 역시 내외부 공간을 초월하는데, 건물 밖에 있는 여자를 찍고 있을 때 남자의 노랫소리가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들리는 식이다. 이 장면은 공간을 일치시킨다는 점에서 앞선 화상 통화와 유사하게 기능한다. 그러나 뒤따르는 것이 꼭 행복이어야 하는 법은 없다. 영화를 통해 함께한 마지막 순간 이후, 여자는 곧이어 택시를 타고 다른 곳으로 떠난다. 기술의 배제로 사랑을 찾는 세계에서 영화는 이들의 마지막 순간을 겹쳐 보인다. 그렇게 현대의 낭만은 영화의 공간에서 다시금 숨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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