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겸손

<리얼 페인> (제시 아이젠버그, 2024)

by 홍석

인스타그램 웹진 '시네마토그래프'에 투고한 글입니다.

※ 스포일러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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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주제를 다뤄도 다른 태도가 느껴지는 작품들이 있다. 차이는 특정 사건이나 인물을 소재로 하는 영화들에서 두드러진다. 연출이나 각본에서, 때로는 미묘한 카메라의 움직임에서 드러나는 변화는 영화 평가의 기준점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논의는 ‘영화의 윤리’라는 해묵은 질문으로 이어진다. 비극이나 참사를 다루는 영화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 사람마다 기준은 다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진실한 위로는 상대방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겸손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제시 아이젠버그의 신작 <리얼 페인>은 그러한 겸손의 미덕을 지닌 작품이다.


사전 정보를 거의 찾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관람 도중 영화가 홀로코스트, 더 정확히는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을 소재로 한다는 사실을 알고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많은 홀로코스트 영화들이 그랬던 것처럼, <리얼 페인>은 현대인의 아픔과 병증을 과거의 비극과 병치하며 치유를 향해 나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영화의 비범함은 결코 회복을 확신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감독은 이 상처를 결코 영화 한 편으로 치유할 수 없다는 것을, 하물며 아픔을 이해하기에도 부족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도돌이표처럼 원점으로 돌아오는 엔딩이 이를 잘 보여준다.


리얼 페인 2.jpg 영화 <리얼 페인> 스틸컷

영화가 시작하면, 카메라는 부드럽게 공항에 있는 사람들을 훑다 앉아 있는 벤지의 모습에서 멈춘다. 그는 공항을 ‘이상한 사람들’이 많아서 재밌는 공간이라고 말한다. 벤지와 데이비드가 여행에서 돌아온 뒤, 벤지는 공항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고 영화는 앉아 있는 그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며 끝난다. 아내와 아이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는 데이비드와 달리, 벤지가 공항 밖으로 나가 미국 땅을 밟는 장면은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다. 폴란드에서 데이비드가 다시 돌아가면 무얼 하겠냐고 물어봤을 때도 그는 제대로 답하지 못한다. 공항은 마르크 오제가 ‘비장소(Non-place)’라고 칭했던 대표적인 공간이다. 오제는 관계, 역사성, 고유한 정체성이 부재한 장소를 비장소라고 보았는데, 이들은 벤지와 데이비드의 폴란드 여행과 맞닿아 있는 가치이기도 하다. 폴란드에서 데이비드는 계속 프레임 속에 홀로 남겨진다. 반면 벤지의 곁에는 거의 항상 누군가가 존재한다. 하지만 영화에서 마지막으로 프레임 속에 남게 되는 인물은 결국 벤지다. 정체성을 찾아 공항을 떠났던 그는 ‘이상한 사람’이 되어 비장소에 남기를 선택한다. 치유 대신 미묘한 우울이 엔딩신에 감돈다.


홀로코스트의 고통은 감독도, 관객도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다. 고통의 흔적 앞에서 영화가 할 수 있는 일은 대사와 내내 흐르던 쇼팽의 음악을 잠시 멈추는 것뿐이다. 그리고 카메라는 알랭 레네의 <밤과 안개>를 연상시키는 움직임으로 그들의 자취를 그대로 되밟는다. 묘지 앞에서 벤지가 가이드에게 말하는 것처럼, <리얼 페인>은 적확한 사실과 통계의 나열보다 살아 숨 쉬던 이들의 흔적을 담는 것에 집중한다. 수용소는 공항과 달리 관계, 역사성, 고유한 정체성이 자리한 공간이다. 비장소를 벗어나지 못하는 벤지에게 이 여행이 절실했던 이유는 세상에 그렇지 않은 공간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함일 것이다. 영화는 수용소에서 희생자들의 경로를 따라 움직이며 그때 그곳에, 그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린다. 이는 오직 영화만이 행할 수 있는 애도의 표현이다.


리얼 페인 1.jpg 영화 <리얼 페인> 스틸컷

폴란드계 유대인 혈통을 지니고 있지만, 감독 제시 아이젠버그는 엄연히 미국인이다. 역사의 비극과 더 직접적으로 닿아 있는 폴란드인에게 타자의 시선을 통한 위로는 그다지 달갑지 않을지도 모른다. 벤지와 데이비드가 할머니가 살던 집 문 앞에 돌을 놓을 때, 먼저 들었던 생각은 저 돌에 누가 걸려 넘어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었다. 그래서 바로 다음 장면에 옆집 주민과 대화를 나누고 돌을 도로 가져가는 걸 보고 크게 안도했다. 치유의 이름으로 다른 나라의 문화를 전유하는 행위는 자칫 폭력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다. 위로는 대상이 되는 나라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존중과 배려에서 비롯된다. 평범한 폴란드 거리에서 폴란드인과 나누는 대화는 그런 맥락에서 소중한 가치를 갖는다. 그래서일까. 영화의 크레디트 제일 위에 폴란드어 대사 담당자가 등장하는 것을 확인하고 마음이 편해졌다.


로드무비는 지금껏 주로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을 다뤘다. 그러나 로드무비는 결코 아픔의 해결책이 아니다. 영화는 타인을 온전히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대신, 각자의 ‘리얼 페인’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인다. 원점으로 돌아온 여행에서 바뀐 게 없을지라도, 세상에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면 충분하다. 영화는 하나의 출발점에 불과하다. 여정이 끝나고 상영관에 불이 켜지면, 그다음은 영화관 밖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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