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의 죽음과 구원

<더 폴> (타셈 싱, 2006)

by 홍석

인스타그램 웹진 '시네마토그래프'에 투고한 글입니다.

※ 스포일러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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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언제 죽음을 맞이하는가? 더 이상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을 때, 다른 이들에게 전달되지 못한 이야기는 그 생명력을 잃는다. 즉 이야기의 마법은 화자와 청자 모두에 기반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의 근처에는 항상 죽음의 위협이 도사린다. <천일야화>의 등장인물 셰에라자드는 죽음을 피하기 위해 천일 하고도 하루 동안 왕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야기의 죽음을 두려워한 이들은 종이나 석판에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겼다. 하지만 온 세상의 이야기를 모아두었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불탄 것처럼 물리적 기록은 필연적으로 유한성을 내재한다.


초창기의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영화 역사의 초기 50년 동안 영화의 제작과 상영, 보관에 사용된 질산염 필름은 최적의 보존 조건에서도 저장된 이미지를 조금씩 파괴하는 성질을 지녔다. 또한 그것은 연소 과정에서 산소를 발생시켜 한번 불이 붙으면 전부 타기 전까지는 절대 꺼지지 않기도 했다. 가연성의 필름은 전쟁을 위한 폭탄 제조 물질로 활용되었다. 따라서 많은 영화 이론가들은 영화가 필름 시대에 늘 생존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21세기와 함께 도래한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이를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활용한 포스트 시네마에서 더 이상 영화는 물리적 현실에 기반하지 않는다. 영화는 필름 대신 데이터로 저장되고, 컴퓨터 그래픽을 통해 상상하는 것을 모두 이미지로 만들 수 있다. 과거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던 필름 영화들은 이제 4K 화질로 리마스터링되어 극장에 걸린다. 필름 영화의 종언, 즉 ‘영화의 죽음’은 아이러니하게도 영화를 죽음의 위기에서 구해낸 것이다.


더폴2.jpg 영화 <더 폴> 스틸컷

최근 디렉터스 컷으로 재개봉한 타셈 싱 감독의 <더 폴>(2006)은 개봉 당시 관객 수의 세 배인 1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글을 쓰고 있는 이 시점에도 타셈 싱 감독이 처음으로 내한해 진행하고 있는 GV가 연일 매진을 기록 중이다. <더 폴>은 촬영 도중 부상당한 스턴트맨이 병원에서 친해진 소녀에게 들려주는 환상적 이야기를 따라간다. 18년 만에 리마스터링된 이 영화는 컴퓨터 그래픽을 사용하지 않고 직접 28개국 올 로케이션으로 촬영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영화가 이야기의 죽음과 구원을 다루고 있음을 생각하면, 이러한 사실들은 더욱 흥미롭게 다가온다.


‘추락’이라는 제목처럼, 영화에는 떨어지는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스턴트맨인 로이는 오프닝부터 다리에서 떨어져서 부상을 입고, 마찬가지로 오렌지 나무에서 떨어져 다친 소녀 알렉산드리아와 친구가 된다. 다리를 다친 그는 삶의 의지를 잃고 계속해서 자살을 시도한다. 떨어지는 행위는 로이의 직업인 동시에 자살을 연상시킨다. 그의 이야기에서 추락의 이미지가 자살로 귀결되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셰에라자드가 죽음을 피하기 위해 이야기를 끊는 반면, 로이는 죽음을 앞당기기 위해 이야기를 중단한다. (그 유명한 도서관의 이름과 같은) 알렉산드리아가 수면제를 가져다주면 이야기를 계속하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스스로를 파괴하는 로이는 비극으로 치닫는 그의 이야기, 그리고 질산염 필름을 떠올리게 한다. 작중 배경이 할리우드 무성영화의 전성기인 1920년대임을 감안하면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이야기를 죽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알렉산드리아는 로이, 그리고 로이의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을 구원하려 한다. 알렉산드리아는 끊임없이 의문을 가지고, 질문하며 로이의 이야기에 개입한다. 청자가 있어야 존재할 수 있는 이야기는 그녀 덕분에 생기를 얻는다. 바로 그 때문에 이 이야기는 알렉산드리아의 것이기도 하다. 계속해서 궁금해하고, 관심을 가지는 이가 있는 한 이야기의 숨은 멎지 않는다. ‘영화의 죽음’ 이후 세상에 등장한 이 영화는 우리가 잊고 지내던 과거의 이야기를 현재로 불러내고 있다.


더폴1.jpg 영화 <더 폴> 스틸컷

검은 무법자는 거대한 천막-스크린을 연상시키는-앞에서 동생의 죽음을 기억하겠다고 맹세한다. 이 영화는 컴퓨터 그래픽의 등장 이후로 우리의 기억에서 잊힌 스턴트맨을 재소환한다. 영화 후반부에 상영되는 버스터 키튼, 찰리 채플린, 해럴드 로이드 등 무성영화 스턴트 스타들의 푸티지는 그 자체로 감동을 준다. 포스트 시네마의 시대에 다다른 우리는 알렉산드리아의 말처럼 ‘그 영상을 계속해서 돌려 보며’ 그들을 끊임없이 재소환할 수 있다. 무성영화의 신화 중에는 디지털 테크놀로지에 의해 구원받아 우리에게 전달된 이야기가 있는 한편, 그렇지 못한 이야기도 많을 것이다. 컴퓨터 그래픽을 배제한 <더 폴>은 그 모든 이야기에 대한 헌사 같은 작품이다. 영화는 듣는 동시에 ‘보는’ 이야기이다. 복면을 벗고 눈을 떠 그들의 이야기를 이어가는 것. 그리고 그 아름다운 모습을 많은 이들에게 보여주는 것. 바로 영화가 육체에 경의를 표하는 방식이다.


참고문헌: 정찬철, 「포스트시네마로의 전환」, 『영화연구』, 제64호(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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