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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사랑했었나요. 아닌가요...

박화요비 "어떤가요"

하루를 시작하면 늘 루틴하게 진행되는 것이 있다. 뭐 그리 대수로운 일은 아니지만 현재의 나한테는 매우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외출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서면  엔진 예열을 위해 오 분 전에 걸어 놓은 시동 때문에 차 문을 열기도 전에 친숙한 노래들이 자동으로 들려온다. 예전 같으면 내가 즐겨 듣던 FM 방송이 늘 틀어져 있었다. 그런데  캐나다에서 살기 시작한 이후로는 유튜브에서 다운로드한 한국의 가요들로 꽉 찬 USB에서 차 안 오디오 시스템을 통하여 내가 엄선한 노래들이 나의 차 안을 고국에 대한 향수로 가득 다.

나의 지인들은 영어실력을 늘리려면 그나마 라디오에서 나오는 뉴스라도 들어야지 한국노래가 웬 말이냐라고 핀잔을 주지만 불과 삼십 분이 안 되는 차 안에서의 노래듣기는 마치 세럼 모이스처 로션처럼 이곳 겨울날씨 같이 메말라 버릴지 나의 정서를 촉촉이 적셔준다.

앞으로 감기 또는 뒤로 감기 버튼을 반복해서 누르며  부분에서 살짝 나오는 인트로 부분을 들으면서 나도 모르는 오늘의 나의 감성과 일치되는 노래를 선택하게 된다. 사실  방식은 나의 의지가 개입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오늘의 나의 감성이 한정된 플레이리스트 안의 노래들에서 가장 적절한 곡을 골라주길 바라야 한다. 그래야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여직까지도 잊지 못하고 있는 추억들을 노래가 아름답게 되살려 줄 테니까..


언제부터인가 나의 음악 듣는 취향이 바뀌었다. 꽤나 이름난 책을 읽어도, 호평 일색이라 나 역시 돈 아깝지 않은 영화를 봐도 절대로 한 번 이상은 보지 않았는데, 요즘 들어 노래 듣는 만큼은 계속계속 반복하며 듣게 된다. 그렇다고 한 곡에 꽂혀서 백 번 천 번 닳도록 듣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날 선택된 노래는 계속 듣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 부르는 것은 당연하고, 옆에서 지나가는 차가 내 차선으로 들어오려고 깜빡거리는 바람에 거기에 정신이 팔려서 노래를 놏치게 되면 되감기 버튼을 다시 눌러 이번엔 놏치지 말아야지 하며 다시 듣는다. 그렇다고 내가 그 노래가 너무 좋아서, 그 가수를 너무 사랑해서 선물을 보낸다거나 하다못해 그 흔한 굿즈 하나 사본 적 없는데 이상하게도 요즘 와서 이러고 있다.

한 번은 내 취향이 왜 바뀌었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뭐 특별한 계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따라 부르려고 외우는 것도 아닌데.. 한 가지 특이점을 꼽자면 노래를 들으면서 나의 아름다웠던 그러면서도 슬펐던 추억을 떠올린다는 것이다. 노랫가사에 담긴 가슴 절절한 사연과 내 기억 깊숙한 곳에 묻어 두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아련한 추억들이 데칼코마니가 되어 과거로 나를 데리고 간다. 아무도 없는 나만의 공간에서 약 삼십 분 동안만. 되감기 버튼을 반복해 누르면서 그 추억의 순서를 흐트러뜨리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오늘 나의 감성의 낚싯대에 걸린 녀석은 "어떤가요"라는 제목의 노래이다. 이정봉이라는 남자가수가 부른 노래로 무지 오래전에 나왔던 노래라는 것, 그 가수는 이 노래를 거의 울다시피 하면서 불렀다는 것, 그래서 그런가 무척 절절하게 다가와서 그때도 좋은 노래다라고 기억하고 있다는 것 정도가 이 노래에 대한 나의 기억의 전부였다. 그런데 어느 날 차에서 들을 노래를 USB에 담으려고 유튜브 검색을 하다가 이 노래를 박화요비가 다시 부른 것으로 듣게 되었다. 그녀의 허스키한 음색으로 다시 듣는  "어떤가요"는 리메이크 곡은 원곡을 따라갈 수 없다는 세간에 알려진 통념과는 다른 완전히 새로운 노래 같았다. 자타공인 노래 잘하는 가수가 불러서였을까 그녀가 부른 "어떤가요"는 또다시 나를 그때의 기억으로 이끌었다.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던 그녀는 누구라도 귀하게 여기는 존재였다. 그런 그녀를 감히 내가 사랑하는 사람으로 두었었고, 그녀 역시 나만을 사랑했었다.


데칼코마니 같은 노랫말 몇 소절...


 "알고 있어요. 어쩔 수 없었다는 걸.

   나만큼이나 당신도 아파했다는 걸."


어쩔 수 없었다. 정말 그 당시에 우리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니다... 나는 그렇게 끝낼 수밖에 없었지만 그녀는 그렇지 않았다. 상황을 역전시키지 못하는 나를 이해해 주었을 뿐이었다.

포기하느니 그 결심으로 어떻게든 붙잡고 이겨나가는 게 사랑이라고 믿고 있었는데 어이없게도 나 자신은 현실과 타협했고 그녀는 강요하지 못했다.

  

"당신 곁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 그댈 아프게 하지는 않나요.

  그럴 리 없겠지만..."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그녀를 얼마나 보석같이 지켜주고 있는지를. 나라를 몇 개나 구해야 그녀를 얻을 수 있느냐는 그의 친구들의 시샘이 나에게도 들려올 정도였다.

그는 그녀를 아프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럴 리 없었다...

 

"나를 사랑했었나요. 아닌가요.

  이젠 당신에겐 상관없겠죠."   


수가 되어 나의 가슴에 꽂히는 노랫말, 그럼에도 내가 이 노래에 집착하게 되는 결정적인 클라이맥스이다.

나에게 이렇게 묻지는 않았다. 의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서로의 진정성은 서로가 너무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녀가 지금이라도 이렇게 묻는다면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사랑했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정말로 이렇게 묻는다면 난 그냥 들을 수밖에 없겠지. 그날의 아픔을, 그날의 눈물을, 우린 너무나도 서로 이해했지만, 난 그 비수를 주저없이 맞을 것이다.

     

모든 사랑 노래가 나의 이야기 같고, 모든 이별 노래도 내 사연을 듣고 만든 것 같은 때가 있기 마련이다. 어쩌면 나의 이야기와 똑같은지 모르겠다며 눈물을 르륵 흘리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랑 노래들이 아직까지도 새것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보면 각자의 이야기가 너무도 구구절절해서 또 다른 새로운 서사가 진행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다.

세상 사는 걱정 하나 없는 그저 어린 나이의 가벼운 감정이라고 치부하면서 아직도 그런 감상이 돈벌이의 수단으로 이용되는 것에 혀를 차며 홱 고개를 돌려도 하나 이상하지 않을 나이인데도 난 여전히 내 이야기를 가지고 만든 노래를 듣고 있다. 우리 그땐 그렇게 사랑했었잖아. 그녀가 나에게 말해주는 걸 들으면서 차를 달린다. 이번엔 어떤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줄까 기대하면서 내일도 차에 시동을 켤 것이다.


https://youtu.be/1KxHQxJmUhc?si=QH5amYbZ7ReTMFa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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