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알게 된 것들
삶에는 평소처럼 살아가는데도 갑작스럽게 균형이 흐트러지는 날이 찾아온다. 그리고 그 흔들림은 항상 예고 없이 찾아오곤 한다.
아이들은 꼭 예고 없이 아프다. 갑작스럽게 오르는 고열로 뒤척이는 밤이면 나도 함께 밤을 새우게 된다. 한 시간에도 몇 번씩 아이의 뜨거운 이마에 손을 얹어보고, 체온계를 눌러 숫자가 조금이라도 오르지 않았는지 확인하고, 열이 오르면 젖은 수건으로 몸을 닦여주고, 열이 내려가면 다시 춥지 않도록 포근한 이불로 감싸주는 일을 반복한다. 그 모든 순간은 길고 어둡게 느껴지지만, 동시에 내가 엄마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눈을 감을 수 없는 밤이다. 아이의 신음 소리 하나에도 가슴이 내려앉고, 새벽의 공기는 더 서늘하게 느껴진다.
아빠의 부재가 처음 다가왔을 때도 그랬다. 떠남은 준비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여러 가지 절차를 처리하는 시간조차 현실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내 나이가 아직 많지 않은데, 벌써 이런 경험을 해야 하나.” 이런 생각이 마음 깊은 곳을 흔들었다. 어떤 친구들은 지금도 부모님께 의지하며 살아가는데 나는 왜 이렇게 일찍 이별을 경험해야 할까, 억울함과 슬픔과 허무함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어른이 되었다고 믿었던 나이에도 여전히 딸이고 싶었는데, 그 마음속 작은 바람까지도 함께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아빠의 자리는 텅 비어 있었고, 그 빈자리는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더 크게 느껴졌었다.
다시 일을 시작하려 했던 시간들은 생각보다 더 많은 물음표를 남기기도 했다. 누구보다 준비한다고 챙겼는데도 강의 준비물 중 꼭 하나씩 빠져 있었고, 몇 번이고 수정해서 저장한 강의안의 오타는 늘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발견되었다. 멘트 연습을 분명 여러 번 했는데도, 어떤 날은 말이 자꾸 꼬여서 내가 내 말에 넘어질 것 같은 순간도 있었다. 출근길에 마음을 다잡아도, 돌아오는 길에는 또다시 흔들리는 내 마음을 발견하곤 했다. 그런 날들이 반복될수록 “왜 나는 유독 이런 일이 많을까” 하는 생각이 더 깊어졌다.
그 순간마다 나는 똑같은 질문을 했다.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는 걸까.” 이 질문은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스스로를 더 힘들게 만들었고, 괜히 나만 뒤처지는 것 같은 기분까지 들게 했다. 다른 사람들은 흔들림 없이 사는 것 같은데 왜 나만 이렇게 요동칠까, 왜 나는 이런 일들 앞에서 늘 연약한 것 같을까, 그런 생각들은 내 마음의 그림자를 더 길게 만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조금씩 다른 시선을 배우게 되었다. 그 시선의 키워드가 바로 아모르 파티, 운명을 사랑하라는 말이었다. 처음에는 그 말이 조금 버거웠다. ‘사랑하라’는 단어가 너무 큰 요구처럼 느껴져서, 도대체 어떻게 이 모든 사건들을 사랑할 수 있다는 건지 이해되지 않았다. 억지로 긍정하라는 말 같아 더 거부감도 있었다. 운명을 받아들이라는 말이 왜 이토록 어렵게 느껴지는지, 그 이유를 스스로 분석해 보기도 했다. 마음으로는 수용하고 싶지만 감정이 따라오지 않는 순간들, 이해는 되었지만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무거웠던 시간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의 속뜻을 조금씩 다시 들여다보면서, 아모르 파티는 단순히 긍정의 주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좋든 나쁘든,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 모든 일들이 결국 나를 이루는 재료가 된다는 개념. 그것은 '사랑하라'는 말보다 '인정하라'에 가까웠다. 나는 이 말이 참 좋았다. 억지로 웃으라는 말도 아니고, 모든 일을 기쁘게 받아들이라는 뜻도 아니었다. 그저 “이 일도 나에게 주어진 하나의 조각”이라고 조용히 인정하는 마음. 그렇게 생각하고 나면, 나를 흔드는 사건들이 조금은 다른 질감으로 다가왔다. 고통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고통의 의미를 다시 읽을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그때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의 내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가 아팠던 밤들은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랑을 품은 사람인지 깨닫게 해줬고, 그 사랑이 나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알게 해주었다. 아빠의 부재는 나에게 가족이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느끼게 해주었고, 내가 누구에게 기대고 있었는지, 무엇이 나를 지탱하고 있었는지를 새삼 깨닫게 해주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았던 시기는 내가 정말 원하는 방향이 무엇인지 다시 확인하게 해줬다. 어쩌면 나는 흔들리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이다. 흔들림이 방향을 찾게 해준 셈이었다.
어쨌든 일어날 일이라면, 내가 막을 수 없는 일이라면 그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는 게 결국 나를 가장 덜 흔들리게 하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제 내가 겪은 일들을 부정하거나 지우려 하지 않는다. 그 순간의 나는 최선을 다했고, 그 최선이 나를 지금까지 데리고 왔다. 어려운 순간마다 도망치지 않고 마주하려 했던 나를 지금은 조금 더 다정하게 바라보게 되었다.
과거의 나에게 지금의 내가 말을 건네본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동안 정말 수고 많았어. 네가 겪은 일들이 너를 힘들게 했지만, 바로 그 일들 덕분에 지금의 너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 앞으로 더 힘든 순간이 또 오겠지만, 너는 분명 또 잘 감당해낼 거야. 그리고 그 모든 과정 속에서 다시 한 번 성장할 거야.” 과거의 나는 이 말을 들으면 아마 울음을 참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알 수 있다. 그 흔들림마저도 내 성장의 과정이었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때의 나도 지금의 나도 모든 순간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같은 상황이 다시 와도 아마 나는 그때와 비슷하게 행동할 것이다. 그것은 후회가 아니라, 내 삶의 리듬을 인정하는 마음이다. 완벽한 선택만을 하며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아모르 파티’를 다시 떠올려본다. 이제 나는 이 말이 단순히 운명을 사랑하라는 뜻이 아니라, 결국 나를 사랑하는 또 다른 방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어난 일을 억지로 긍정하는 대신,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고 마음을 내려놓는 순간, 내 안의 긴장이 조금씩 풀렸다. 완벽해야 한다는 부담을 놓아버리니 감정이 덜 요동쳤고, 마음은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래서 이제는 “왜 이런 일이 생길까”라고 묻기보다 “이 일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될까”라고 천천히 되묻는다. 이 질문 하나가 내 시선을 바꿔준다. 흔들림은 여전히 찾아오겠지만, 그 흔들림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 방법을 나는 조금씩 배워가고 있다.
삶은 계속해서 예상하지 못한 장면들을 내게 건넬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모든 순간이 나를 조금씩 단단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그것이면 충분하다.
아모르 파티! 그 말은 결국, 흔들림 속에서도 나를 놓치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잠시, 작은멈춤>
1. 최근 일어난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일’은 무엇이었나요?
2. 그 일에서 내가 배운 것은 무엇이었나요?
3. 지금의 나는 그 일을 어떤 의미로 바라보고 있나요?
"통제할 수 없는 순간을 받아들이는 일은, 결국 나를 지키는 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