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언보다 기다림이 더 큰 응원이 되는 순간
나는 원래부터 불안이 많은 사람이다. 무언가를 시작할 때 설렘보다 걱정이 먼저 마음을 파고든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스스로 무언가를 하겠다고 나설 때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늘 ‘혹시’라는 두 글자였다. 혹시 넘어지면 어떡하지, 부딪혀서 울면 어떡하지, 상처받으면 어떡하지, 실망하면 어떡하지, 준비가 부족하면 어떡하지…. 아이들은 성장할수록 도전이 많아졌고 그만큼 내 마음속의 불안도 함께 커져갔다.
하지만 그런 나의 마음과는 달리, 아이들은 어느 순간부터 달라졌다. 예전에는 엄마가 시키니까 움직이고 도와줘야 겨우 해내던 일들이었는데, 이제는 “내가 해볼래.”, “한번 나가보고 싶어.”, “이번엔 도전해볼까?” 같은 말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 말들이 낯설었다. 반가움보다 걱정이 먼저 찾아왔다. 첫째가 부회장 선거에 나가고 싶다고 했을 때도 그랬다. “해봐!”라고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수없이 흔들렸다. 떨어지면 슬퍼할 텐데, 겉으로 괜찮아도 마음은 아프지 않을까…. 그런 걱정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나를 잡아당겼다. 둘째가 태권도 품띠 시험에 도전했을 때도 비슷했다. 새로운 동작에 자꾸 틀리고 속상해하는 얼굴을 보면 “괜찮아, 다음에 해도 돼”라는 말을 목 끝에서 꺼낼까 말까 몇 번을 망설였다. 내가 보기엔 충분히 잘하고 있는 것 같아도 아이 스스로에게는 벽으로 느껴질 때가 있으니까.
그러나 시간이 조금씩 지나면서 나는 한 가지 사실을 또렷하게 깨달았다. 내가 불안한 이유는 아이가 해낼 수 있을지 의심해서가 아니라, 오직 아이의 마음이 다칠까 봐 두려웠던 것뿐이라는 걸. 그리고 또 하나, 그 두려움이 있다고 해서 아이의 도전을 막는 것이 엄마의 역할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아이가 선택한 도전은 엄마가 설계해주는 것이 아니라 아이 스스로 감당해보며 배우는 과정이다. 엄마는 그 선택의 무게를 대신 들어주는 사람이 아니라 옆에서 조용히 지켜봐주는 사람이라는 걸 나는 뒤늦게야 받아들였다.
그 무렵, 아이들이 점점 커가면서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들이 늘어나자 나도 자연스럽게 일을 다시 할 용기를 냈다. 일을 다시 시작한다는 설렘과 ‘이래도 될까?’ 하는 불안이 뒤섞였지만, 아이들이 두려움 속에서도 ‘내가 해보겠다’고 나서는 모습을 보며 나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나도 다시 해볼까?”, “나도 다시 시작할까?”라는 용기를 꺼낼 수 있었다.
아이들의 도전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선거도, 시험도, 친구 관계도, 새로운 선택들도. 그리고 그때마다 엄마의 불안도 어쩌면 계속될지 모른다. 불안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익숙해질 뿐이다. 오히려 나는 아이들이 스스로 해보겠다고 나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잃어버렸던 용기를 다시 찾아야 할 것이다.
아이들의 한 걸음은 내 마음에도 잔물결처럼 번져 내가 오랫동안 미뤄두었던 꿈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아이들을 응원하는 마음과 내가 다시 시작하려는 용기는 생각보다 훨씬 가까운 곳에서 함께 자라고 있었다. 아이들이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 나 역시 조용히 한 걸음씩 앞으로 움직일 것이다.
<잠시, 작은멈춤>
1. 아이의 도전을 지켜볼 때,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 무엇이었을까?
2. 조언이나 개입보다 ‘기다림’을 선택했던 순간, 나는 어떤 변화를 느꼈을까?
3. 앞으로 아이의 또 다른 도전 앞에서, 나는 어떤 엄마로 서고 싶은가?
“아이가 도전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동안, 나도 다시 시작할 용기를 배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