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심쿵하게 만드는 예상 밖의 순간들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였다. 첫째에게 둘째 학원 등원을 부탁해 두고, 나는 여느 때처럼 일터에 있었다. 홈캠을 켜면 아이 둘이 나란히 있을 거라고, 아무 일 없을 거라고, 나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홈캠을 켜자마자 가장 먼저 보였어야 할 둘째가 보이지 않았다. 혹시 화장실? 혹시 방? 혹시 숨바꼭질? 머릿속은 단번에 수백 가지 시나리오로 하얘졌다. 급하게 둘째에게 전화를 걸었다. 벨이 울리는 내내 심장이 멈춘 듯했다.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들려온 건 예상했던 울음도, 당황한 목소리도 아니었다. “엄마! 나 컵라면 먹고 있어!!!”
… 뭐라고? 순간 심장이 멈췄다가 다시 뛰기 시작했다. 컵라면? 어디서? 누가 해줬어? 둘째는 신나게 외쳤다. “나 혼자 문구점 왔어! 내가 계산하고, 뜨거운 물도 받고, 혼자 먹는 중!”
그 목소리에는 세상 모든 것을 얻은 아이 같은 자랑스러움이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혼자 길을 건넜다고?”, “뜨거운 물을 혼자 받았다고?”, “지금 그걸 자랑한다고?”라는 아찔함과 황당함이 세트로 밀려왔다. 그런데 잠시 뒤, 그 모습을 상상하는 순간 더 이상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집을 나와 조심조심 길을 건너고, 문구점 문을 밀고 들어가 무인계산대 앞에서 서툰 손으로 바코드를 찍고, 컵라면 뚜껑을 벗기고, 뜨거운 물을 한 컵 받아 의자에 앉아 진지하게 후루룩 먹고 있는 둘째. 아… 이걸 어떻게 혼내겠나.
사실 둘째는 평소 겁이 많고 차도 무서워하고 오토바이도 무서워하는 아이였다. 아파트 단지에서 택배 트럭 소리가 들려오거나 배달 오토바이 소리가 가까워지기만 해도 잽싸게 몸을 피하던 아이여서, 혼자 어디를 간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 아이가 혼자 문구점을 간다니, 그것도 뜨거운 물까지 받아 컵라면을 먹는다니. 그 순간 나는 두려움과 감탄을 동시에 느꼈다. 아이 안에서 무언가가 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강하게 실감했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이 변화의 배경에는 최근 생긴 ‘무인 문구점’이 있었다. 우리 동네에는 원래 문구점이 없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조용하고 자유로운 무인 문구점이 생긴 것이다. 사실 둘째는 낯도 많이 가리는 아이다. 직원에게 말을 걸어야 하는 편의점보다 아무도 없는 무인 문구점이 훨씬 편했을 것이다. 눈치 볼 필요도 없고,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공간에서 천천히 구경도 하고, 나에게 사달라고 부탁할 물건도 고르고, 게다가 컵라면과 ‘한강라면’까지 먹을 수 있으니 아이에게는 그야말로 완전한 천국이었다. 그곳을 알게 된 뒤부터 둘째는 완전히 라면의 세계에 빠져버렸다. 너구리, 육개장, 튀김우동... 기분에 따라 골라 먹는 작은 미식가처럼 변해 있었다.
그래서인지 홈캠으로 보게 된 사건도 하나둘 늘어갔다. 어느 날은 하교 시간이 되어 집에 잘 왔나 확인하려고 홈캠을 켰는데, 둘째가 TV를 켜놓고 스낵면을 생라면째 부셔 먹고 있었다. 바삭바삭 씹는 소리가 화면 너머로 들릴 것 같은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났다. “라면을 정말 좋아하긴 좋아하는구나…” 하고 넘어갔는데, 다음 날엔 더 강력한 장면이 기다리고 있었다. TV를 보며 컵라면을 먹고 있는 둘째. ‘이 뜨거운 물을 어떻게…?’ 놀랐지만, 동시에 TV와 라면이 함께 있는 그 상황이 둘째에게 얼마나 행복했을지 알 것 같았다. 평소에 내가 있을 때는 조심스럽게 라면 먹어도 되냐고 어렵게 허락을 받고 먹었는데, 혼자 있으면서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할까. 작은 독립, 작은 일탈, 작은 자유. 아이는 그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어른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문구점 사건 이후 집에 돌아온 둘째는 미니 탐험가처럼 신나게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문구점 문이 생각보다 무거웠다든지, 뜨거운 물이 조금 무서웠지만 해냈다든지, 계산대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당황했지만 결국 성공했다는 이야기 등. 그 작은 모험 속에는 아이가 스스로 키워낸 용기와 자립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나는 걱정하면서 웃었고, 웃으면서 또 걱정했다. “아… 나도 진짜 아들 키우고 있구나…”
육아는 거창한 사건보다 이런 작은 이벤트들로 채워진다. 잔잔한 하루도 좋지만, 돌아보면 마음에 오래 남는 건 늘 이렇게 예상치 못한 장면들이다. 아이가 조금 위험한 방식으로 자라는 순간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세상을 스스로 배워가는 순간들. 아이가 한 걸음 더 성장했다고 느끼는 장면들은 늘 이런 예상 못 한 곳에서 찾아온다. 그날 나는 깨달았다. 아이의 독립은 때로 엄마의 심장을 세게 흔들어 놓지만, 그 흔들림 속에서 아이도, 엄마도 함께 자란다는 것을.
<잠시, 작은멈춤>
1. 최근에 나를 놀라고 웃게 '아이의 순간'이 있었나요?
2. 나는 아이의 엉뚱한 순간을 보며, '웃음'이 먼저였나요? '걱정'이 먼저였나요?
3. 아이가 혼자 해본 일 중,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귀엽다고 느낀 일이 있나요?
“육아는 늘 계획대로 흘러가진 않지만, 그게 또 하루를 특별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