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학원에서 만난 회원들끼리 그룹을 지어 답사를 다녀온 적이 있다. 40대 중반인 남자 분이 계셨는데 여러가지 일을 많이 하는 나를 보고 참 부지런하다며 칭찬해주셨다. 기분 좋게 던지신 칭찬 끝에 물으셨다.
"이렇게 바빠서 남편 밥은 차려줘요?"
"남편 밥을 제가 왜 차려줘야 돼요?"
곧바로 내가 되묻자 이 분은 정말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떨어진 턱을 도통 주워올리실 줄을 모르셨다. 별로 친한 사이가 아닌데도 표정 관리가 영 안되시는 걸 보니 정말 황당하신 모양이다. 어색한 침묵이 흘러 내가 덧붙였다.
"아니...제가 바쁜 게 보이신다면서요. 저희 남편은 영어강사 일 외에 따로 재테크나 부업 하는 것 없고요. 쓰레기 버리고 아침에 아이들 등원 버스 태워주는 것 말고, 집안일은 전부 저 혼자 하고요. 저는 영어수업에 학원 스케줄 관리, 학부모 상담, 원비 및 비용 관리, 세금관리 등 저희 학원 운영하는 일도 남편이 한국말을 못하니 저 혼자 다 하고요. 부동산 학원 다니며 투자공부하고 재테크도 하고, 블로그 하고, 체험단 하고, 틈 날 때 마다 청소 빨래 다 하면서 매일 아침 저녁 아이 둘 식사 챙기고, 목욕도 혼자 시켜요. 하루종일 엉덩이 붙일 시간도 없어요. 그런데 제가 남편 밥까지 차려줘야 돼요?"
"아...아니...그래도 남편이랑 하루종일 같이 재택근무 하시니까."
"그러니까요. 남편이랑 하루종일 같이 있는데 내가 더 하는 일이 많고 바쁘니까 남편이 제 밥을 차려줘야되는 것 아니에요? 내 끼니를 챙겨 받지는 못할 망정, 바빠 죽겠는데, 제가 그 와중에 사지육신 멀쩡한 남편 삼시세끼 밥까지 챙겨줘야돼요? 어차피 수업 때문에 부부가 밥을 같이 못 먹지만 점심시간이 같다고 해도 저희 남편은 제 일상의 수고로움을 하나하나 다 인정해주기 때문에 본인의 식사 준비를 저에게 전혀 기대하지 않아요."
"허허...국제결혼 하셔서 그런가, 우리랑 생각이 다르시네...."
"글쎄요. 이게 국제결혼 문제 일까요? 저랑 6살 밖에 차이 안 나시는데 저랑 결혼했을 수도 있는 세대이시잖아요. 저 같은 애랑 결혼 하셨음 큰 일 날 뻔 하셨네요. 허허허..."
웃고 넘겼다. 기승전-국제결혼, 기승전-외국물. 친구들 심지어 가족들도 나의 생각에 동의를 못하거나, 너무 두드러진 나의 '신여성' 적 면모가 이해가 안 될 때는
"너는 외국에 오래 살았으니까."
"너는 외국인이랑 사니까."
로 대화를 종결짓곤 했다. 어색해진 분위기를 가까스로 넘길 수 있도록 항상 답을 정해주는 국제결혼이라는 큰 핑계거리가 있는 걸 고맙게 여겨야 되는건지 모르겠다.
어느 주말, 남편을 집에 혼자 두고 아이 둘을 데리고 친정에 갔다. 팔순이 넘은 외할머니께서 오매불망 기다린 증외손주들과 외손녀인 나를 반겨주신다.
"아이고 어서온나. 어서온나. 너그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다. 근데 라서방은? 라서방은 안왔나? 라서방 밥은 우짜고 홀랑 애들만 데리고 니 혼자 왔노? 이틀동안 라서방 밥은 우얄라카노."
밥,밥,밥... 또 그놈의 밥타령이다. 아니, 당최 이해가 되지 않는다. 라서방은 할머니 손녀와 결혼하기 전까지 10년이 넘게 혼자서 자취를 하며 스스로 끼니를 챙겨먹었던 사람이고, 사지와 수족이 마비된 환자가 아니다. 부엌에 걸어들어가 혼자 요리를 해먹을 수도 있고, 영어버전이 있는 배달의 민족 앱 버튼을 누룰 수 있는 손꾸락도 열 개나 있다.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에서 이틀 밤 자고 올거라고 했더니, 조용한 집에서 혼자 정크푸드 마음껏 먹으며 밤새 텔레비젼을 보며 혼자만의 시간을 즐길 생각에 승천하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땡큐! 땡큐!" 연발하는 게 라서방이란 말이다. 남편에게 혼자만의 자유시간을 주고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 행을 택한 나의 속 깊은 배려를 칭찬하기는 커녕, 아내의 배려에 호강 중인 남편의 끼니를 다른 사람들이 왜 이렇게 걱정하는지 모르겠다. 할머니께 또 속사포 분노의 랩을 선보였다.
"아니할머니라서방은영어강사일외에따로재테크나부업하는것없구요쓰레기버리고아침에아이들등원시키는것말고집안일은전부저혼자하구요저는영어수업도주10시간이상하면서학원스케줄관리학부모상담원비및비용관리세금관리등저희학원운영하는일도남편이한국말을못하니저혼자다하구요부동산학원다니며투자공부하고재테크도하고블로그하고체험단하고틈날때마다청소빨래다하면서매일저녁아이둘식사챙기고목욕도혼자시켜요......블라블라블라블라블라블라블라......그런데제가남편밥도차려줘야돼요?"
"라서방은 외국인이라가 혼자 잘하는가베."
"할매, 라서방이 외국인이라서 그런 게 아니고, 대한민국 모든 성인남자들도 똑같아요. 정 안되면 라면이라도 끓여 먹으면 되지. 할매! 세상이 변했어요! 나는 외손녀니까 그렇다치고 손주며느리 들어왔을 때 그런 말 하시면 안돼요!"
친정에 도착해서 인사하자마자 다시 뒤돌아 나가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내 집에 돌아간들 이틀 안자고 왜 벌써 돌아왔냐고 라서방도 반겨주지 않을 것 같아 그냥 눌러앉았다.
당사자인 우리 부부는 합의된 역할 분담을 바탕으로 독립적으로 각 자 맡은 바 역할을 잘 이행하며 하루하루 평화로운 일상을 잘 보내고 있는데 갑자기 제 3자들이 가부장적 사고의 잣대로 나를 못난 아내로 몰아세우는 느낌이다.
18세에 부모님 집에서 독립해서 10년 간 스스로 매 끼 챙겨먹으며 자취한 우리 남편이 결혼하여 아내를 맞이했다고 해서 아내가 차려주는 밥을 먹어야된다는 것은 무슨 논리인가? 남편은 아내를 맞이했지 식모를 맞이한 게 아닌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