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있는 삶을 위해 살아있는 동안 죽음을 철저하게 준비해야 되다는 역설
"만약에 ~라면 어떡할래? ~ 중에 뭐를 택할거야?"
나는 If 게임 매니아다. 우리 삼남매와 친정부모님은 오래도록 나의 If 게임에 시달리곤 했었다.
"엄마 로또되면 어떻게 할거야?"
"언니 키 160센티 원빈이 좋아? 키 180센티 옥떨메가 좋아?"
같은 가벼운 우스갯 소리 부터
"언니 언니는 이혼하면 어떻게 할거야? 양육이랑 재산분배는? 돌싱이 된다면 또 재혼 할 것 같아? 아니면 그냥 계속 혼자 살 것 같아?"
"엄마 만약에 말기 암에 걸리면 어떻게 할거야? 수술을 받을거야? 병원에서 권하는 대로 할거야? 아니면 자연치유나 민간요법 같은 걸 해볼거야? 엄마 병원 엄청 싫어하잖아. 그리고 은퇴하면 자연인 처럼 살거라고 했잖아"
라는 식의 무거운 주제도 나의 If 게임에 등장한다. 결혼 후에는 If 게임의 희생양이 남편으로 바뀌었는데 신기한 점은 모든 희생양들이 "또 시작이냐?" 라며 지긋지긋해 하면서도 나의 질문에 항상 진지하게 답해준다는 것이다.
여하튼 나는 그렇지않아도 '만약' 에 대해서나 여러가지 잡생각이 많은 사람인데 서울대학교 유성호 교수님의 '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 간다.' 라는 책을 읽고 부터 '죽음', '우리 삶의 마지막 단계로서의 죽음' 에 대하여 깊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 사명을 발견했다 라고 까지 표현할 만큼 나에게 큰 충격을 준 부분이 있었는데, 현대의 많은 사람들이 '죽음' 이라는 단어가 갖는 두려움의 감정과 어두운 무게 때문에 죽음은 먼 훗 날의 일로 치부하여, 평소 죽음에 대해 전혀 생각해보거나 대비 하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전혀 준비 없이 갑작스레 죽음을 맞이하게 됨으로써 겪는 부작용에 관해 언급한 부분이었다.
평소에 지병이 있었든 갑작스런 사고를 당했든 환자의 상태가 위중해져서 중환자실에 들어가게 될 경우, 이 때 부터 환자는 온 몸이 의료장비들과 엮인 채 산소호흡기를 쓰고 있기에 환자와 가족 사이의 소통이 불가능해진다.
환자 본인이 원하는 삶의 마지막 단계에 대하여 평소에 가족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는 경우 라면, 본인이 원치 않더라도 온갖 호스를 몸에 달고 그레이존 (삶과 죽음 중 어느 영역에 속하는지 불분명한 졸음과 혼수상태) 에 기약없이 머물러 있어야 한다. 더욱이, 환자의 질병의 호전을 포기한 상태에서 현 상태를 유지하는데만 목적을 둔 연명의료가 장기화될 경우, 산소호흡기 및 각종 의료장치에 의해 목숨을 연장시키는 이 의미없는 연명의료를 중단할지 말지를 남아있는 가족들이 결정해야 된다는 큰 문제가 생긴다.
평소에 이 부분에 대해서 환자와 미리 이야기가 되어 있다고 해도, 마침내 가족을 떠나보내기 위해 연명의료 중단 서류에 싸인하는 일은 힘든 순간 일 것이다. 그런데 환자 당사자의 뜻을 모르는 상태에서, 전적으로 가족구성원의 의사에 의해 연명의료 유보 혹은 중단 여부를 결정해야 된다면, 남겨진 가족이 겪을 정신적 부담과 고통은 엄청날 것이다.
이처럼 준비되지 않은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 본인의 마지막을 스스로 결정하지도 못할 뿐더러, 가족에게는 자신의 목숨에 대한 결정을 하도록 짐을 지우게되고, 가족과 제대로 작별인사를 건넬 기회도 갖지 못한 채 허망하게 중환자실에서 홀로 이승을 떠나게 된다. 이런 비극은 매일매일 대한민국의 중환자실에서 일어나고 있다.
KBS '거리의 만찬' 52화 메멘토모리 편에서 개그우먼 박미선 분이 20년 전 장기간 중환자실에 입원 중이시던 아버지의 연명의료 중단 결정을 내린 일을 떠올리며 아직도
"그 결정이 옳은 것이었을까?", "그것이 최선이었을까?", "아버지가 더 사실 수 있었는데 내가 너무 빨리 보내드린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에 죄책감을 느낀다며 더 이상 방송진행이 어려울 정도로 대성통곡을 하였다. 이런 박미선 님에게 게스트로 출연한 암투병 중인 환우 분이 박미선 님이 죄책감에 힘들어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님이 바라는 바가 절대 아닐 것이고, 그 역시도 본인이 떠난 후 가족이 그를 떠올리며 죄책감을 느끼거나 미안해하길 절대 바라지 않는다며 위로를 건네는 모습을 보고 같이 울었던 기억이 있다.
박미선 님의 모습을 보니 나의 남편, 딸, 아들 혹은 나의 부모님이 나의 마지막 순간을 결정짓는 마음의 짐과 죄책감을 갖게 하지는 말아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그래서 내가 임종과정에 있을 경우, 무의미한 연명의료의 중단을 선언하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국민건강보험을 방문하여 등록해놓았다.
죽음이 우리 삶의 마지막 단계라면 삶의 종착점이 죽음인걸까. 의미있는 삶을 위해 살아있는 동안 최선을 다해 죽음을 준비해야 되다는 역설.
MBC 스페셜 '내가 죽는 날에는' 편은 32살에 대장암으로 생을 마감한 청년 송영균 님이 삶을 마무리하는 과정과 그가 생전에 요청한 대로 진행된 그의 장례식/추모모임 이야기를 담았다. 그는 심폐소생술을 포함한 모든 연명의료를 거부한다는 연명의료계획서를 써놓은 상태였고 죽기 전까지 병원 입원실 침상에서 시간을 보내기를 거부했다.코 앞에 닥친 죽음을 마주하고도 호흡이 힘든 상황에서도 '의미' 있는 삶을 살기위해 독서모임을 진행하며 '이것도 삶이다. 살아내야한다.' 라고 말하는 그를 보고 큰 울림을 얻은 적이 있다.
호흡곤란 증세가 심해져 도저히 숨을 쉴 수 없어, 곁에서 그의 모습을 촬영을 하던 제작진이 119 구급차를 불러 줄 상황까지 그는 평소처럼 자취방에서 혼자 생활했으며, 고향에 계신 어머니나 다른 가족의 간병도 받지 않았다. 죽는 순간까지 오롯이 혼자 힘으로, 늘 그랬던 것 처럼 외롭지만 독립적인 삶을 살아냈다.
그런 그가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자신을 위한 특별한 장례식을 요청한다. 자신이 떠나고 나면, 어느 한 따뜻한 봄날 햇살이 좋은 곳에서 모두 모여 맛있는 음식을 차려놓고 와인도 한 잔 곁들이며 자신이 남기고 간 영상메세지를 같이 보면서 그와의 추억들을 함께 나누고 울고 웃으며 자신을 애도하는 시간을 가져달라는 것이다.
다큐멘터리의 마지막은 그가 그리던 장례식이 따뜻한 추모파티로 실현되는 모습으로 끝난다. 삶의 한 과정, 삶의 마지막 단계로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죽음의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삶을 살아내는 모습.
그의 죽음의 기록이 일면식 없는 나의 사고와 인생도 이렇게 흔들어 놓았으니, 그는 진정한 '메멘토모리' 를 이루어내고 간 것 같다.
"만약에 내가 죽으면 ......"
"만약에 네가 죽으면, 너가 죽는 날엔 어땠으면 좋겠어?"
요즘 나의 If게임 고정 질문이다.
내가 죽는 날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