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점코치 모니카 Sep 17. 2020

너는 엄마가 있어서 좋겠다.

아버지의 혼잣말


서른 중반이 다 된 시집 간 딸들이 오래도록 2세 소식이 없자 빚 독촉을 하는 것 처럼


"너그는 마카다 와 그라는데? 와 아를 안 놓는데? 내 친구들은 전신에 다 할매할배 됐는데!"


니들는 모두 다 도대체 왜 아이를 안 낳느냐. 내 친구들은 전부 이미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었노라고 전화만 하면 '손주독촉' 을 하셨을정도로 오매불방 기다린 손녀들이라, 나와 하루 차이로 출산한 언니와 나의 첫 딸들은 유난히 사랑을 많이 받았다.


첫 딸을 낳기 전까지는 우리 친정 부모님이 아기를 그렇게 좋아하시는 줄 몰랐다. 딸이 태어난 뒤 처음으로 친정에서 1박을 한 날 새벽, 우리 엄마는 식당에 출근하려고 앞치마 까지 매고도 발 길이 떨어지지 않아, 어두컴컴한 방에 쪼그리고 앉아 한참동안 자고 있는 신생아였던 외손녀를 쳐다보고 계셨던 적도 있다. 내가 자다깨서 깜짝 놀라 엄마 뭐하시냐니까 손녀가 이뻐 죽겠다고, 하루종일 얘만 쳐다보고 있었으면 좋겠다고, 출근하려니 도저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하셨던 손녀바보 할매가 되셨다.


더 놀라운 건 친정아버지의 모습이다. 아버지는 텔레비젼에 아기 모델이 나오거나, 누가봐도 귀여운 아기들이 지나가도 귀찮아하시고 아무 감흥이 없으신 분이셨다. 그런데 역시 피는 당긴다고 하더니. 처음으로 할아버지 타이틀을 달고 첫 손녀인 우리 딸을 대하는 우리 아버지의 모습은 낯설 정도였다. '우리 아빠 맞아?'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손녀에게는 한없이 관대하고 너그러우시다.


딸이 노는 모습을 휴대폰 영상으로 찍어놓으시고 돌려보고 또 돌려보신다. 디지털 휴대폰이라 망정이지 비디오테이프였으면 테이프가 다 늘어날 판이다. 또 아버지는 만나는 사람들에게마다 우리 딸이 한 아주 사소한 행동들에 대해서도 같은 이야기를 오백번씩 반복하셨다.


딸이 말을 하기 시작하고 "Why?" 질문을 시작할 무렵, 아버지는 나에게 아이가 같은 질문을 계속 물어봐도 화내지말고 잘 대답해주어야한다고 육아훈수를 두기도 하셨다.


"아버지는 나 어릴 때 같은 말 자꾸하면 짜증내셨잖아요?"


라고 되물으니


"허허허 그 때는 못 배우고 먹고 살기 바빠서 너희 어릴 땐 이렇게 예쁜 줄 모르고 키웠다. 요즘은 그렇게 하면 안돼."


라고 하시다가도, 음식을 가려먹이거나 최신 육아용품으로 무장한 외손녀들을 보시고는 뭘 그렇게 유난스럽게 키우냐고 너희처럼 귀하게 아이를 키우려드니 하나 둘 밖에 못 낳는 거라고 언니와 나의 육아방식을 타박을 하시기도 하신다.


어느 날은 사소한 트집으로 짜증을 내던 아이가 할아버지, 할머니가 아무리 달래도 소용이 없고 엄마만 찾았다. 딸이 내 품에 안겨 안정을 찾아가는 모습을 한참을 지켜 보시더니 아버지가 작게 혼잣말을 하셨다.


"니는 엄마가 있어서 좋겠다..."


우리 아버지는 친엄마에 대한 기억이 아예 없으시다. 아주 어릴 때 아빠를 낳아주신 친할머니는 병으로 돌아가셨는데 사진 한장 조차 없다. 손재주가 좋은 화가가 친할머니의 작은 증명사진을 확대해 그려놓았다는 영정사진 크기의 초상화 액자 하나가 전부이다. 아버지가 아는 엄마의 모습이나 내가 아는 친할머니의 모습이나 그 그림 한장이 전부인 것이다.


옛날 사람치고는 키가 무척 커서 친할아버지보다 머리 하나만큼 더 키가 크셨다는 우리 친할머니. 내가 중학교 때 어느덧 170센티가 훌쩍 넘었고, 어느 날 목욕탕에 다녀오느라 긴 머리카락을 대충 묶어 쪽진 머리마냥 5대5 가르마가 되었던 적이 있다. 나와 같이 식사를 하시던 아버지가 나를 빤히 쳐다보시더니 갑자기 장롱 깊숙이에서 할머니 초상화를 꺼내와서 내 얼굴과 대어보며 진짜 똑같다며 네가 키도 크고 아마 우리 엄마 모습이 네 모습이었을 것 같다고 하신 적도 있다.


엄마란 존재에 대한 따뜻한 기억이라곤 한점도 없이, 계모 밑에서 무남독녀 외아들로 몸도 마음도 가난하게 자랐을 아버지가 겪었을 설움과 외로움은 상상 조차 불가하다. 어린 아이였을 아버지를 떠올리면 한없이 불쌍하고 애처로운 마음이 들지만 객관적인 것이 개인적인 것이 될 때는 그것을 다른 이들과 똑같이 바라볼 수는 없게 된다.


이런 결핍 투성이인 아버지가 이룬, 결핍 투성이의 가정에서 자란 딸의 입장에서 아버지를 바라볼 때는 나의 이해심이나 인내심은 항상 바닥을 드러낸다. 평생 엄마를 고생시키는 부족한 남편, '너네 생각해서 너네 잘 되라고 그랬다' 라는 변명과 함께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자식을 사랑하는 미성숙한 아버지의 모습만 보고 자랐기에 아버지를 떠올리면 존경이나 사랑 혹은 연민이나 이해 같은 긍정적인 감정보다는 분노나 원망의 마음에 압도되는 것이 사실이다.


잠잠해졌다 싶으면 또 깨지는 가정의 평화. 아버지의 결핍이 오롯이 투영되어 온전치 못한 우리 가정에서 자라면서 나는 반복되는 분란 속에서 부모님께 제발 당장 이혼하라고 악다구니를 쏟는 미성숙한 딸이 되었다.


나 같은 미성숙한 딸이 나이가 차고 결혼을 했다고 해서 덜컥 아이를 둘 씩이나 낳아 엄마가 되고 보니 순간순간 두려움에 사로 잡힌다.


나는 왜 이 모양일까? 나는 왜 아이한테 이렇게 밖에 못할까? 우리 엄마아빠는 나한테 왜 이렇게 했을까? 그렇게 안 했다면 내가 지금 좀 더 너그러운 사람이 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그런데 그게 또 엄마아빠 잘못은 아니지. 엄마아빠는 더 어렵게 자랐는데. 엄마아빠도 당신들의 부모를 선택할 수 있었던 게 아닌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나 자신도 미성숙한 엄마가 되고 미성숙한 아내로 사는 것에 복잡한 심경이 된다.

우리 아버지를 아버지로 가진 다른 사람이 나에게 자기 아버지의 이야기를 한다면, 나 역시도 오은영 박사님이 쓰신 책 내용을 들면서 미성숙한 부모가 있기 마련이고 그 부모 역시 올바른 환경에서 자라지 못해서 그렇다고 부모님 돌아가시면 후회할 것이니 너가 더 이해하라고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모법 답안을 줄지도 모르겠지만, 당사자가 되고 보니 그런 이해심을 발휘하고 착한 딸이 되기가 힘이 든다.


평소에는 그렇다.

그런데 "니는 엄마가 있어서 좋겠다..." 라고 손녀를 부러워하는 할아버지의 혼잣말을 들으니 그 순간은 나도 우리 아빠가 너무 짠했다.



끝.



작가의 이전글 내가 죽는 날에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