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출산기 2
외국에 살면서 음식 때문에 고생을 해본 적은 한 번도 없을 정도로 나는 아무거나 잘 먹는 스타일이다. 가끔씩 호주 슈퍼마켓에도 파는 신라면을 사서 끓여먹는 것으로 손쉽게 한식에 대한 그리움이 해결되는 정도였다.
그런데 임신을 하고 나니 매일 한식이 먹고 싶었다. 매일 매운 음식이 먹고 싶었고 호주의 무더운 날씨 때문인지 냉면과 시원한 물회가 그렇게 먹고 싶었던 기억이 난다.
무탈하게 임신 중기 기간을 보내고 두 번째 초음파 검사를 통해 제이든보다 스카이가 우리 부부를 먼저 찾아온 것도 알게 되었다. 첫 딸은 살림 밑천이고 엄마의 영원한 친구라기에 마냥 설레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여자는 첫 아이를 임신했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이야기에 진심으로 공감하던 시절이었다.
출산일이 다가올수록 호주에서의 몸조리가 걱정이었다. 호주는 여성의 산후 몸조리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다. 호주 여자들은 출산 직후 냉장고에서 꺼낸 차가운 오렌지주스나 요거트를 먹고, 필요시 출산 바로 다음날 에어컨이 빵빵하게 틀어진 슈퍼마켓이나 백화점으로 외출도 한다.
심지어 아기의 경우에도 우리나라 전통인 삼칠일 같은 개념이 전혀 없어서 동네 카페나 주말 실외 마켓에 나가보면 태어난 지 일주일이 안 된 아기를 슬링에 메고 나온 엄마나 신생아를 유모차에 태워 산책을 나온 부모를 흔하게 볼 수 있다. 우리나라 같으면 무균실 상태와 비슷한 산후조리원 신생아실에만 머물러야 할 아기들이 공공장소에 외출을 나오는 것이다.
첫 아이를 낳고 2주째 되던 주말. 날씨가 무더우니 시댁에 방문하여 마당 수영장에서 아기와 수영을 하자고 제안하시는 시부모님의 초대를 거절했을 때 나는 시댁 식구들에게 유난스럽고 별난 사람 취급을 받은 적이 있다. 우리 아이는 한국인이기도 하지만 호주인이기도 하니 시댁 의사와 문화를 따라야 하는 것도 맞지만, 도저히 생후 2주 된 필수 예방 접종도 마치지 않은 아이와 외출도 모자라,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는 것은 한국인인 나에게는 너무 꺼림칙하여 남편과 다투어가며 거절을 했던 기억이 있다.
출산이 임박해오자 사정상 친정어머니가 호주 방문이 어려운 나는 산후조리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산후 조리원은커녕 어떤 한국식 산후조리법도 이용 가능한 것이 없는 상황이었던 터라 아기를 낳고 먹을 미역국이라도 미리 준비해놓고 싶었다.
내가 살던 호주 브리즈번에는 아시안 타운이나 한인타운은 도시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정반대 쪽인 북쪽에 살고 있어서 한식 재료를 사려면 시내까지 나가야 되는 상황. 미리미리 한식을 준비해 놓아야 했다.
이미 결혼 한 지 몇 년이 흘렀던 시기였지만 살림을 호주에서 처음 시작한 터라 한식보다 양식을 요리하는 것이 더 익숙했고 김치는커녕 쌀밥도 잘 안 해 먹던 나였는데, 인간은 절박하면 움직이게 되어 있다.
내가 깍두기를 담그다니.
차를 타고 한인 슈퍼마켓에 들러 한국식 무와 고춧가루, 새우젓 등의 재료를 사 와서 인터넷 레시피를 보면서 깍두기를 생전 처음으로 담그어 보았다. 한국식 배추는 구하기도 어렵고 아무래도 김치보다는 만드는 과정이 만만한 깍두기를 택했는데 결과가 아주 만족스러웠다. 작은 무 2개를 썰어놓으니 혼자서 한 달 정도는 충분히 먹을 양이 나왔다.
다음은 미역국 차례였다.
주변에 먼저 출산한 한국 친구들이 혼자 몸조리했던 노하우를 나누어주었다. 미역국이나 곰탕처럼 영양가 높은 국을 한 솥 끓여 플라스틱 용기에 소분해서 미리 얼려도라는 것이다. 호주 사람들은 곰탕을 먹지 않으니 소꼬리나 소뼈 같은 것이 엄청 저렴하다. 마트에서 소꼬리를 만원 남짓한 가격에 사 와서 고아보았는데 무얼 잘못했는지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이걸 어쩌지 버려야 되나 고민하다가 미역국 육수로 썼더니 계획에 없던 소꼬리 미역 진국이 탄생되었다. 소고기가 듬뿍 들어간 농도 짙은 미역국을 냉동실 가득 얼려놓으니 마음까지 든든했다.
냉장고를 그득그득 채워놓고 난 다음에는 출산 가방을 싸기 시작했다. 인터넷 맘 카페에서 출력해놓은 리스트에 있는 품목을 웬만한 것을 다 구했다. 한국 이민자들이 운영하는 중고카페를 이용하면 한국 산모들이 쓰는 물건들도 손쉽게 구할 수 있다.
도넛처럼 생긴 회음부 방석, 일회용 팬티, 순면 손수건, 겉싸개, 속싸개 등 호주에도 팔지만 한국사람들이 이용하는 특정 브랜드나 상품이 더 자연친화적이고 신생아가 사용하기에 보다 안전한 물건들로 엄마들이 직접 사용해본 경험으로써 검증해준 제품이라서 한국 엄마들이 이용하는 물건들을 미리 구해놓았다. 이럴 때 보면 역시 한국 사람들이 위생 개념도 철저하고 건강과 안전에 대한 민감도가 높다고 느낀다.
출산예정일이 12월 28일이었는데 일주일 전에 퇴사를 한 상태였고 이제는 정말 모든 준비를 마쳤는데 진통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호주는 출산에 있어 매우 자연스러운 과정을 지향하기에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40주 전에는 분만촉진제를 쓰는 유도분만을 하지 않는다.
나처럼 공립병원을 이용하는 산모의 경우는 무조건 40주까지는 자연진통이 오기를 기다려보고 간혹 40주 차에 유도분만을 해주는 병원도 있지만, 보통은 41주까지 자연진통을 기다린다.
12월에 첫째가 태어나기를 바랐는데 새해가 밝고 41주에 접어들었는데도 우리 아기는 소식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밤. 자정부터 묵직하게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 이 느낌은 뭐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