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출산기 3
고등학교 때 뮤지컬 배우 최정원 님이 수중분만으로 출산하는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양수 속에 있던 태아 시절과 유사한 환경을 아이에게 제공하고 산모에게도 고통을 줄여주고 아빠도 함께 참여 가능한 출산. 수중분만이라는 것 자체도 그것을 실행으로 옮긴 최정원 배우님도 매우 멋있어 보여서 뇌리에 강하게 남은 프로그램이었다.
호주 브리즈번 북쪽 지역에 살고 있던 나는 Royal Brisbane and Women's Hospital에서 출산 예정이었다. 공립병원을 이용하는 환자는 따로 특정 병원을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 이 병원에 배정받은 것이 내심 기뻤는데 그 이유는 이 병원은 40여 년 전 우리 남편이 태어났던 병원이기도 하고, 나의 로망 '수중분만' 이 가능한 '버쓰센터 birth centre'가 있는 곳이어서 여러모로 나에게는 특별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때 티브이에서 본 수중분만을 나도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니 정말 기뻤고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Royal Brisbane and Women's Hospital에서 이용 가능한 일반 병동 시설과 버쓰센터 시설 중에서 버쓰센터를 택했다. 버쓰센터는 출산 전 과정에서 의료진과 약물의 개입 없이 숙련된 조산사들의 도움으로만 출산하는 '자연출산'을 지향하는 센터이다.
제왕절개 수술을 받지 않아도 의사와 함께 촉진제나 무통주사 같은 약물의 도움을 받고 출산을 하는 것은 '자연분만'이고 의료진의 개입이 전혀 없이 어떤 약물도 전혀 쓰지 않고 현대의학이 발달하기 이전처럼 조산사의 도움으로만 출산하는 방식이 '자연 출산'이다.
수중분만은 '자연출산' 과정에서만 가능하므로 수중분만에 심하게 몰입해 있던 나는 주변의 선배 엄마들이 에피 듀럴(무통주사) 없이 출산을 해서는 안된다며 경고를 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망설임 없이 버쓰센터에 등록을 했고 자연출산에 대한 열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수중분만을 하면 나도 최정원 뮤지컬 배우님처럼 초자연적이면서도 우아하게 출산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남편은 어떤 방식이든 산모인 내가 원하고 더 편안함을 느끼는 방식으로 선택하라고 지지해주었다. 인터넷 맘 카페에 올라온 출산 후기들을 수백 개 읽으면서 순간순간 무통주사 없이 출산할 수 있을까 라는 두려움과 의심이 들 때마다 큰 욕조를 떠올리며 수중분만을 할 수 있다면 괜찮을 거라며 나 자신을 다독였다.
35주를 넘어서면 아기가 너무 커서 출산에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유도분만을 통해 이른 출산을 권하는 한국병원과는 달리 호주 병원에서는 자연진통이 올 때까지 기다린다. 40주까지는 무조건 기다리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보통 42주까지 꽉 채워 기다린다.
우리 첫째는 12월 28일이 출산예정일이었는데 새해가 밝아도 전혀 진통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기다리고 기다리다 41주가 넘어서야 진통이 왔다. 자정부터 진통이 시작되었지만 병원에 미리 가봤자 너무 초기 단계일 경우 다시 집으로 돌려보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이야기를 이미 인터넷 맘 카페를 통해 접했고, 우리 병원 주차장은 새벽 6시에 오픈이라 더 일찍 병원에 가면 주차도 문제였기에 6시를 고지로 삼고 통증을 참았다. 머릿속에 이런 타산을 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밤새 겪은 진통은 참을만한 고통이었다는 뜻 이리라.
그렇게 날이 밝아 6시가 되어 남편을 깨워 출산 가방을 챙겨 들고 버쓰센터에 갔다. 너무 멀쩡하게 걸어와서 지시사항을 듣고 서류에 직접 사인을 하는 나를 보고 간호사들은 속으로 나를 집에 돌려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내진을 해보고 자궁문이 20% 이상 열린 것을 확인하고는 어쩌면 그렇게 calm 하냐며 놀라워했다. 41주가 되었는데 그 정도 진행이 안 되는 게 더 이상한 것이 아닌가 싶어서 나는 그들의 반응이 더 황당했다. 내진 후 쫓겨나지 않고 무사히 앞으로 이틀 동안 나의 거처가 될 입원실에 짐을 풀었다.
버쓰센터에서는 출산 병실과 입원실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 출산을 한 동일한 방에서 그대로 쉬다가 퇴원을 하게 된다. 보통은 최장 1박 2일 입원을 원칙으로 하기 때문에 오전 일찍 출산을 했으면 당일 저녁 바로 퇴원이 가능하고 저녁에 출산을 했다면 하룻밤을 출산한 그 방에서 묵고 다음날 퇴원을 한다.
호주 브리즈번 버쓰센터 복도에는 빼곡히 사진이 걸려있는 벽이 있는 복도가 있다. 이 복도를 사이에 두고 한쪽은 버쓰센터 다른 한쪽은 일반 산부인과 병동이 위치해있다. 버쓰센터에서 자연출산을 시도하다가 여러 가지 이유로 응급상황이 발생할 경우에 산모는 일반 산부인과 병동으로 옮겨져 의료진의 케어를 받게 된다.
이 복도에는 지금까지 이 곳에서 출산한 산모와 가족들의 사진이 진열되어 있는데 산모가 거의 알몸이거나 중요부위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사진 혹은 산모의 자궁에서 아기의 머리만 나온 상태의 사진 등 다양한 출산 모습이 적나라하게 담긴 사진이 진열되어 있어 우리 남편과 나를 경악케 했다. 우리는 우리의 출산 모습이 진열되기를 희망하지 않는다는 부분에 크게 v 틱 표시를 했다.
오전 6시에 병원에 입실해서 계속 진통을 겪고 있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고통이 심해져 눈물이 뚝뚝 흐르는 지경에 까지 다다랐다. 배가 너무 아파서 나는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옆으로 누워만 있고 싶은데 조산사들이 교대로 들어와 누워만 있으면 진행이 더디어진다며 짐볼에 앉혀 운동을 시켰고 계속 걷게 하거나 그것도 못하겠다고 하니 앉아있게 했다.
수중분만을 위해 물을 준비하고 따뜻한 물속에 들어가니 배도 덜 아프고 살 것 같은 느낌에 물속에서 욕조 벽에 기대어 잠깐 졸고 있으니 조산사가 와서 물속에서 너무 편한 자세가 되어버리니 진행이 느려진다면서 욕실에 들어가 서서 샤워기로 물을 맞으라고 했다.
남편과 같이 욕실로 들어가 남편은 의자에 앉아서 내 배 위에 따뜻한 물이 뿌려지도록 계속 샤워기를 들고 있었다. 나는 배가 아파 엉엉 울면서 엉거주춤 알몸으로 서서 남편이 뿌려주는 온수를 맞고 있었다. 이 시간은 나도 힘들었지만 아침부터 식사도 못한 채 불편한 자세로 계속 샤워기를 들고 고통에 울부짖는 아내를 지켜보기만 해야 되는 우리 남편에게도 심신이 너무나 고생스러운 시간이었다.
그렇게 낮 2시가 되었다. 2시가 조산사들이 교대시간인 모양이었다. 오전에는 젊은 조산사였는데 이번에는 흰머리 지긋한 조산사 한 분이 오셔서 인수인계를 받으시고 내진을 해보자고 하셨다. 새벽 6시에 들어와서 이때 두 번째로 내진을 받았다. 인터넷 후기 글들에는 출산 중에 내진을 자주 받는 것처럼 보였는데 오전 조산사가 자기 퇴근 전에 출산을 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나를 내버려 두었나 원망이 들었다. 조산사가 바뀌고 나니 무언가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진을 하니 40퍼센트 이상이 진행되었다며 이제 더 빠른 진행을 위해서 조산사 분이 양수를 터뜨리겠다고 하셨다. 무언가가 뱃속으로 깊숙이 들어오는 느낌이 들더니 아랫도리에 물이 주르륵 흘렀고 이때부터 지옥을 맛보았다. 양수의 버퍼를 받지 않는 상태에서 뱃속에서 아이가 움직이니 진통이 올 때마다 도저히 말로는 묘사할 수 없는 통증이 몰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