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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점코치 모니카 Oct 19. 2020

미니 감자탕

외국인 남편이 한국인이 다 되었다고 느낄 때 2

사진출처 https://m.blog.naver.com/33dijqbpqk/220619323550



호주 사람인 우리 남편은 아이들을 엄청 잘 봐준다. 육아와 가사는 반반 나누어해야 된다는 인식이 확실하기에 육아에 있어 아무래도 엄마인 내가 평소에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많고 세세하게 아이들을 챙기는 부분이 많으니 남편은 이 부분에 대해 부채 의식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선지 가끔씩 평일 저녁이나 주말에 내가 외출할 일이 있어 일정을 상의를 하면 남편은 아이들을 돌보는 것에 무조건 오케이 사인을 준다.


남편의 쿨한 오케이 사인의 이면에는 일상의 잔업을 쳐내느라 수고하는 아내에게 리프레시 기회를 주고 싶은 순수한 마음(?)도 있겠지만, 향후 본인이 외출할 일에 대비해서 쿠폰을 쌓는 의도도 있으리라. 이유가 어찌 되었든 내가 외출을 해도 항상 흔쾌히 아이들을 돌보아 주는 남편 덕에 배우고 싶은 것이 있을 때 몇 주씩 이어지는 코스 강의를 등록하거나 주말에 타 도시에 있는 친구를 방문할 때도 남편 눈치 보지 않고 마음 편하게 부탁할 수 있다.


서로의 외출에 대해 이런 쿨한 자세를 유지하는 우리 부부라 서로가 외출을 했을 때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큰일이 아니면 연락하지 않는다. 장소를 이동하면 행선지를 옮겨 잘 도착했다는 것을 메시지로 확인해주고 내가 외출 중일 경우 식사 때마다 남편과 아이들이 원하는 배달 음식을 원격 주문해준다. 식사가 끝날 때 즈음이면 아이들과 식사는 잘했느냐는 확인 메시지 정도를 주고받을 뿐 전화를 하는 일은 거의 없다.  


미취학 자녀 2명을 키우며 반복되는 지리멸렬한 일상에 치여 남편도 나도 지쳤으니 서로 외출했을 때만이라도 제대로 기분전환이 될 수 있게 방해를 하지 않고자 함이다. 그래서 남편이 가끔씩 주변에 사는 비슷한 처지의 외국인 친구들과 주말 술자리가 있어 집을 나설 때 인사는 "See you tomorrow."이다.


인사가 암시하듯 "씨유 투마로우." 하고 나가면 당일에는 그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없다. 오랜만에 나가는 만큼 시간과 밀도를 최대한으로 즐기고 오는 듯하다. 나에게 내 친구들은 외박하는 남편을 어떻게 용납하느냐고 의아해한다. 


우리 부부는 서로를 '전적으로' 믿는다. 서로를 실망을 시킬 일이나 스스로에게 위험한 일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자유를 허용하는 것이고, 무엇보다 개인적으로 나는 딴짓할 사람은 1시간만 자유가 주어져도 딴짓을 할 것이고 정신이 올바로 박혀있는 사람은 밤새도록 나가 놀아도 자식에게 아내에게 부끄러울 짓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배우자가 꽁꽁 구속해야지만 통제가 되는 상대라면 어차피 같이 살 의미가 없다.  


새벽 1시에 들어오든 새벽 6시에 들어오든 어차피 나와 아이들은 그동안에 잘 것 이기에 다음 날에 특별한 일정이 없는 경우라면 남편의 귀가 시간이 나머지 가족에게 중요하지 않다. 남편이 오랜만에 자기의 언어를 쓰는 친구들과 만나서 실컷 웃고 떠들고 마시며 회포를 푸는 자리에서 귀가 시간 신경 쓰며 스트레스받지 않길 바란다.   


다음 날에 참석할 결혼식이 있다거나 아이들을 데리고 외출하기로 미리 일정을 짜 놓은 경우라면 남편은 술자리에 가더라도 알아서 해가 뜨기 전에 들어와 다음 날 일정 중에 피곤하지 않게 잠을 좀 자거나 술 먹는 양도 조절한다. 다음 날에 아이들과 동물원에 가기로 했는데 전 날 모임이 너무 재미있어서 도저히 자리를 뜰 수가 없어 밤을 새우고 귀가했다고 하더라도 다음날 아이들과의 약속은 꼭 지킨다. 동물원에 다녀와서 오후부터 익일 아침까지 자는 한이 있어도 아이들과 나와 미리 해놓은 약속은 지킨다. 이런 모습을 늘 봐왔기 때문에 남편이 "씨유 투마로우." 하고 나가면 나도 같이 웃으며 보내줄 수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역시나 씨유 투모로우 하고 나가서 야무지게 놀고 다음 날 새벽 지하철 첫 차를 타고 들어온 남편. 그런데 남편에게서 김치 양념 같은 냄새가 난다. 뭐하고 놀았냐고 물어보니 여전히 알딸딸한 취기가 남은 정신에 신이 나서 수다를 늘어놓는다. 평소에는 우직하고 조용한 성격인 우리 신랑은 술만 마시면 입에 모터를 달고 쉴 새 없이 수다를 떤다. (그래서 가끔씩 남편의 의중을 디테일하게 들을 일이 있으면 나는 조용히 술상을 차린다.)


"브라이언 알지? 한국에 10년 산 친구 있잖아. 그 친구가 오늘 나에게 새로운 행오버 hang over 푸드를 알려줬어. 당신 '미니어처 감자탕' 알아? 1인용 미니 감자탕을 파는 곳이 있더라니까.  게다가 24시간 오픈이래. 트웬티포 아우얼스! 오, 마이 갓! 밤새 놀고 배고픈데 미니 감자탕 국물 먹으니까 피로가 확 풀리는 느낌이더라. 1차부터 다시 놀기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에너지가 생겼다고. 베스트 행오버 푸드를 발견했어!"


외국에서는 항상 술자리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숙취 음식은 햄버거나 피자이다. 호주의 경우 24시간 동안 문을 여는 식당은 패스트푸드점과 조각피자 혹은 터키식 케밥을 파는 상점 혹은 편의점뿐이라 주말에 밤새 술집이나 클럽에서 놀다가 귀가하는 젊은이들은 이런 음식들로 허기를 채운다. 우리 아파트 바로 앞에도 맥도널드가 있어서 그 날 이 '위대한 발견' 전까지는 남편이 맥도널드 빅맥을 먹는 것으로 화려했던 밤을 마무리 짓고 귀가했었다. 그런 그에게서 한국적인 고춧가루 양념 냄새가 폴폴 풍기는 것이다.


'미니 감자탕'......? 남편은 24시간 뼈다귀 해장국 집에 간 모양이었다. 남편보다 한국에 오래 거주한 우리 동네 영국인 아기 아빠가 남편에게 해장국을 소개해 준 것이다. 평소에는 감자탕의 거대한 뼈의 비주얼에 압도당해 '세상에 고기 종류가 얼마나 많은데 굳이 저걸 먹어야 되냐.', 혹은 '당최 뼈에 붙은 살을, 심지어 젓가락으로, 어떻게 발라먹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 라며 감자탕을 싫어하던 남편이었다. 


그런데 오늘 그 영국인 친구가 뼈를 뚝 부러뜨려 중간중간 뼈다귀 진액을 빨아먹는 비법, 젓가락 질이 능숙하지 않은 외국인들도 젓가락 한 짝으로 만도 '키 스팟 key spots' 핵심 지점들만을 콕콕 공략하고 도려내어 살을 효과적으로 발라 먹는 비법을 전수해준 모양이었다.


이런 홈메이드 home-made 스럽고 정성 가득한 하티 hearty 푸드를 단 돈 6천 원에 24시간 내내 언제든지 먹을 수 있는 것이 또 한 번 '어메이징 코리아'를 만든다고 남편을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무엇보다 숙취에 국물이 주는 효능이 특히 '언빌리버블' 이라면서 본인이 지금까지 술을 먹고 쓰레기가 된 것은 쓰레기 숙취 음식을 먹어서였다고 했다.


미니 감자탕 덕에 숙취가 없다며 큰소리치던 남편의 최후는 장담한 것만큼 그리 '클린' 하지는 못했다. 1차부터 다시 놀 수 있을 정도로 정신은 멀쩡하다고 큰 소리를 쳤으나 김치와 깍두기를 그득 담은 미니 감자탕 국물을 원샷한 탓에 화장실에서 뜨거운 맛을 본 것이다. 


그렇게 뜨거운 맛을 보고서도 그 날 이 후로 늘 지하철 첫 차와 뼈다귀 해장국으로 밤마실을 마무리하는 남편을 보면 나보다 더 화끈한 한국인 같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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