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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점코치 모니카 Nov 16. 2020

내가내가 병

너는 왜 그렇게 피곤하게 사냐?

분기마다 모이는 대학 동기 모임이 있다. 졸업 후 전국 각지로 흩어져 지내는터라 주말마다 모이는데 아이를 남편이 봐주는 친구들도 있고 데리고 오는 친구들도 있다. 30대 중반을 넘기고 보니 다들 미취학 아동 자녀들이 있어서 아이들을 데리고 다같이 마땅히 모일 장소가 없어서 몇 년 전부터는 항상 가장 넓은 집에 사는 당산동 친구네에서 모인다. 


이 당산동 친구는 학교 때 부터 주변 사람들을 잘 챙기고 싹싹하기로 유명했다. 여러 명이 모여 식사를 하거나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도 착석하자마자 바로 냅킨을 셋팅하고 수저를 깔아주고 사람들에게 메뉴판을 읽어주며 의견을 수렴해 주문을 했다. 모임 자리가 마무리 될 때 쯤이면 항상 이 친구는 총무를 자처해 재빨리 계산기를 두드리고 n분의 1로 나눈 음식값을 거두어 빌지를 정리했다.  


이렇다보니 우리 모임의 장소를 정할 때도 식당이 아니라 누구의 집에서 모이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 나오자 이 친구의 집에 모이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진 것 같다. 이 친구집에서 몇 번 모임을 갖다보니 생긴 패턴이 있는데 일단 11시 즈음부터 모이면 그 동네 순대 맛집에서 순대전골을 점심으로 주문한다. 케잌이나 더치커피 등을 들고 오는 친구들이 있어 매번 따로 디저트를 준비할 필요는 없다. 약속을 한 것도 아닌데 돌아가면서 누군가는 꼭 디저트를 사온다.  


음식을 만들 필요는 없지만 상을 차리거나 커피를 만들거나 설거지를 하는 품이 들어가는데 이 모든 일을 집주인 당산동 친구가 혼자서 한다. 친구들이 미안해서 도와주려고 해도 '내가 하는 게 더 편해. 가만히 앉아 있어. 그게 나 도와주는거야.' 라고 진심으로 도움을 거부한다. 집주인 친구가 혼자 일을 하다가 도움이 필요하면 무엇을 어떻게 해달라고 다른 친구들에게 정확히 오더를 내려주니 우리는 가만히 있다가 당산동 친구가 시키는대로만 하면 된다. 


이런 상황이 나는 진정으로 편하다. 친구가 부엌에서 혼자 일하고 있어도 나는 그 집 거실에서 다른 친구들과 편하게 이야기 할 수 있다. 바로 내가 당산동 친구와 아주 비슷한 부류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일을 내 손으로 직접 처리해야 직성이 풀리는 '내가내가 병' 을 앓고 있다. 내가 그녀고 그녀가 나이기에 나는 진심으로 그녀가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는 걸 알아서 마음이 편하다. 


하지만 다른 친구들은 당산동 친구 혼자 부엌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이 상황을 매우 불편해하며 자꾸 부엌 주변을 서성이거나 진짜 안 도와줘도 되냐고 재차 확인하며 오히려 당산동 친구가 했던 말을 자꾸 반복하게 한다. 어정쩡하게 앉지도 서지도 못한 자세로 거실과 부엌 사이에 서있는 다른 친구들 달리 나는 마음이 편한데 내가 정말 괜찮다는 당산동 친구의 말을 전적으로 믿게 된 계기가 있다. 


우리 딸이 돌 무렵 기저귀를 차던 시절 당산동 친구집에서 놀다가 딸이 폭풍 응가를 하는 바람에 겉 옷 밖으로 까지 응가가 삐져나온 적이 있다. 


다과 준비로 여전히 바쁘던 당산동 친구에게 내 딸의 응가가 폭발했다고 화장실을 좀 쓰겠다고 했더니 이 친구가 하던 일을 멈추고 우리 딸을 번쩍 안아들더니 화장실로 데리고 가서

"어머~ 우리 딸래미. 시원하게 응가했쪄요~. 이모가 응가씻겨줄게요~."

하더니 뜨거운 물을 틀어 맨 손으로 우리 딸의 황금똥을 씻겨내는 것이다.

"앗..00야. 뭐해. 내가 할게. 악. 내가 한다니까. 어머 괜찮니. 어머 드러운데. 헙 친구야 내가 할게 어머 헛 헙..."

화장실이 어딘가 싶어서 두리번 거리던 나에게서 아이를 잽싸게 낚아채어 가더니 바람같은 속도로 뜨거운 물을 틀고 아이 옷을 벗겨서 순식 간에 엉덩이를 닦는 친구의 빠른 손놀림에 나는 어안이 벙벙했고 놀라고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는 나에게 친구는

"야 드럽긴 뭐가 드러워. 내가 애 안 키워본 거도 아니고."

하면서 기어코 우리 딸 궁디를 직접 닦아주고 어디서 또 바람같이 로션까지 가져와 발라주었다.  


이 친구는 정말 레전드였다. 내 구역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직접 완벽하게 내 손으로 처리하는 그녀의 프로페셔널함에 존경심이 우러나왔다. 그와 더불어 남의 아이 똥까지 씻겨 줄 수 있는 것은 '내개내가 병'을 넘어서 천성적으로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타고나 털털하고 싹싹함을 그녀 깊이에 장착하고 살아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0년 넘게 봐온 친구였지만 다시 한번 그녀를 인정하게 되었다.   


"얘얘얘 빨리 이리와서 앉아. 너가 서성거리면 00가(당산동친구) 일하는데 더 방해만 되는거야. 도와주고 싶으면 여기와서 딱 가만히 앉아있어. 00는 딱 자기 방식대로 자기 혼자 직접 뭐를 해야되는거야. 진심으로 네 도움 필요없어. 내가내가 병이야. 나도 똑같아서 저 마음 알아."  

당산동 친구가 빵터진다. 


"내가내가 병이라니 딱이다. 딱 맞는 말이야. 나 진짜 좋아서 이러고 있는거야. 이래야 내가 편해."

그제서야 모든 친구들이 자리에 앉아 당산동 친구가 내오는 디저트와 커피를 마음 놓고 받아 마신다. 커피를 마시면서 


"진짜 카페 퀄리티다. 너는 어디서 이런 밖에서 파는 것 같은 컵을 사놨냐. 이 많은 얼음을 언제 다 얼려놓았냐. 정말 부지런하다." 

라고 이 친구에게 고마움을 표현해주면 당산동 친구는 진심으로 기뻐한다. 자기가 기획한대로 결과물이 나와 이것을 여러사람이 즐기는 모습을 볼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끼는 스타일인 친구이다.  


모든 일을 직접 똑부러지게 처리하는 당산동 친구는 아이도 다른 친구들 보다 일찍 낳은 편이라 선배맘으로서 똑소리는 나는 육아정보나 교육정보도 나누어주었고, 작아진 옷이나 장난감도 친구들에게 자주 나눠주곤 했다. 굳이 맞벌이를 하지 않아도 되는 운동장 같은 집에 사는 형편이더라도 자신의 커리어를 이어나가고 아이도 남편도 완벽하게 케어하느라 항상 바지런히 바쁘게 사는 친구이다. 하는 일이 많다보니 스트레스로 학생 때 처럼 뾰루지가 올라온 당산동 친구 얼굴을 보면서 다른 친구들이 왜 그렇게 피곤하게 사느냐고 걱정어린 질타를 하기도 하지만 나는 이 친구를 이해할 수 있다.


이 친구에 비하면 피래미 같은 수준이긴 하지만 나 역시 '내가내가 병' 을 앓으며 역할 부자로 살아가는터라, 우리 같은 부류에게는 혼자 이것 저것 이고 지고 살아서 피곤해도 그 속에서 매일매일 반복적으로 작은 성취감을 얻을 수 있는 바쁜 생활이 여유로움 속에 권태나 우울이 끼어드는 생활 보다 더 행복하기 때문이다.


아직 기저귀를 차는 둘째의 응가를 치우다가 당산동 친구 생각이 났다. 남의 아이 똥을 맨 손으로 닦아 줄 수 있는 털털함은 몇 년이 지나도 떠오를 때 마다 경외가 든다. 코로나 때문에 대학 동기들이 올해는 한번도 못 모였다. 당산동 친구가 사는 동네 순대전골 맛집이 코로나를 버텨내고 남아있어야 될텐데... 그 순대전골이 정말 맛집인건지 친구들이랑 같이 먹어서 맛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여튼 그 맛이 그리운 날이다.  






사진출처: https://blog.naver.com/rkgus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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