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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점코치 모니카 Aug 27. 2020

아침에 딸의 머리를 땋다가......






아침에 딸의 머리를 땋다가, 딸을 샤워시킨 후 딸의 머리를 말려주다가, 병설 유치원 다니는 딸의 점심 도시락을 싸주다가 갑자기 원망스러운 마음이 올라와 울컥할 때가 있다. 남들은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고 나면 친정엄마와 사이가 더 좋아지고 친정엄마의 한없는 은혜를 깨닫고 엄마와 사이가 더 각별해진다는데, 나는 엄마가 되고 참으로 복잡한 감정을 느끼며 살고 있다.


평생 쉬지 않고 몸이 부서져라 육체노동을 이어오며 책임감이 결여된 친정아버지를 대신해 우리 식구를 먹여살린 엄마에 대한 고마움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나에게 엄마의 존재는 내가 사는 이유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그래서 엄마가 온 몸으로 노동하여 나를 길러준 것에 대한 보상으로 자랑스러운 딸이 되어 심리적인 보람도 드리고 싶고, 엄마의 육체적 노동을 그만 멈추어 드리고 싶기에 지금도 여러가지 도전을 이어 오며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효녀 심청이인 내가 딸을 낳고 보니, 내가 엄마가 되고 보니, 문득문득 엄마에 대한 원망이 솟구쳐 올라올 때가 있어 당황스럽다는 것이다. 아침 등원 전 딸의 머리를 땋아줄 때는, 새벽 같이 식당 장을 보러 나간 부모님 없는 빈 집에서 언니와 내가 고사리 손으로 서로의 머리를 땋아준 기억이 나고, 병설 유치원을 다니는 딸아이의 방학 기간 중 도시락을 싸주어야 할 때에는, 나의 어린 시절 초등학교 3학년 때 부터 마침내 전국적으로 급식이 시작되었던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 3년 내내 아침에 스스로 계란물을 입혀 햄을 굽고 비엔나를 구워 도시락을 싸다닌 기억이 떠올라 울컥할 때가 많아졌다.


내가 엄마가 되어 아파트 놀이터에 나가보니 7세인 내 딸보다 한뼘 정도 더 큰 여자아이가 그네를 타고 있다.


"너는 몇 학년이니?"

"3학년이요."

"아 그래 네가 3학년 이구나..."


내 딸보다 겨우 한 뼘 더 큰 네가 3학년이구나. 이제 겨우 그네 줄을 야무지게 쥐기 시작할 무렵이 3학년인데. 알람소리 듣고 스스로 새벽에 일어나 학교 갈 준비를 하고, 언니 것 까지 도시락 2개를 매일 싸던 어린 내가, 겨우 저 그네 타는 아이만 했을 것 생각하니 화가 치밀어 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나이를 먹을 수록 마음이 더 깊어지고 철이 들어야되는데 나는 어쩜 사춘기에도 없던 반항심이 내일 모레 마흔이 다 되어 올라오는 것인지.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 누구보다 애썼고 그 당시 엄마로서는 아침 식사까지 맡아가며 식당을 운영했어야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었으니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이해를 해보려고 했고 지금까지는 늘 그렇게 이해를 했다.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내가 엄마가 되기 전까지는.


내가 엄마가 되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는 선택', '피치 못 할 상황' 이라는 감정에 대한 호소가 모든 이성적 사고를 눌러왔기에 나는 엄마를 이해해주는 착한 딸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엄마가 되고 보니 혼자서는 반팔 티셔츠도 스스로 벗지 못하고, 물 한잔 안 흘리고 스스로 잘 마시지 못하는게 아이들인데, 어린 아이에게 나의 친정엄마는 너무 큰 짐을 지워준 것이 아니었나. 내 눈으로 어린 나를 마주하고 나니 자꾸 의문이 들었다.


단지 육아나 자식의 안전이나 양육 따위가 엄마에게 우선순위가 아니었던 것이 아닐까? 책임감없는 아빠를 푸쉬하기 보다는 포기하는 것이 오히려 더 편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엄마 자신이 일선에 서서 생계를 해결한다는 변명으로 자식이 후순위로 밀리는 것을 자기합리화 한 것이 아닐까? 


이성이 감정을 압도하여 이런 질문들을 해대기 시작하자 원망과 분노가 솟구쳤고 아침마다 불 앞에서 고사리 손으로 도시락을 싸는 어린 내가 불쌍해 미칠 지경이었다.


'가게 때문에... 가게 때문에...'


여느 친정엄마들이 챙기는 딸들의 사사로운 경조사. 출산이라든지, 출산 후 몸조리 라든지, 자취할 때 부모님의 방문이라든지, 해외에서 들어올 때 공항에 마중을 나온다든지... 이런 종류의 살뜰한 챙김은 '가게 때문에' 여유가 없는 우리 친정엄마에게는 늘 당연히 못해주는 것이었다. '당연히' 라는게 과연 당연히 존재하는걸까. 무언가를 당연하게 만드는 것도 결국 본인의 선택이 아닌가.


이런 생각들을 평소에 자주 하다보니, 어느 명절 날 친정에서 온 가족이 둘러앉아 가만히 티비를 잘 보다가, 드라마에서 친정엄마가 결혼한 딸의 몸조리를 도와주는 장면을 보고는 엄마에게 악다구니를 퍼붓게 된다.


'엄마가 우리 가족을 위해서 희생하고 정말 열심히 산 것은 무조건 인정하고 고맙게 생각하지만, 살뜰하고 세심하게 챙겨주는 친정엄마 역할로 보면 엄마는 빵점이야.'


위로 오빠 한 명 밖에 없는 동네 친구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깜짝 놀라며 자기도 엄마고 되고 나서 자꾸 친정엄마가 밉고 원망스러운 감정이 들어 '내가 왜 이러지.' 라며 죄책감도 갖고 친정어머니께 미안한 마음도 들던 중이었단다. 너무 혼란스러웠는데 똑같은 마음을 나도 갖고 있다니 하니 이 친구가 반가워(?)하며 안도했던 적이 있다. 이 친구도 마음 속에 짠한 어린아이 모습의 자기 자신을 품고 있다고 했다.


내 인생 전부를 다 바쳐 힘들게 실컷 키워놨더니, 내 딸이 나중에 내가 늙었을 때  '이래서 나는 엄마한테 섭섭하고 저래서 원망스럽다.'  라고 하면 억장이 무너지고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아서 나부터 우리 친정엄마에게 마음을 곱게 쓰려고 하는데도 잘 안 되는 걸 보면 나는 한참 모지란 인간인가 라는 생각을 했다.

오늘 아침에 딸의 머리를 땋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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