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영은 진실을 가리지만, 위기는 진실을 드러낸다."
정헌주 연세대 교수는 이 말로 한국 국제개발협력(ODA)이 마주한 현실을 꿰뚫었습니다. 겉으로는 예산이 꾸준히 늘며 성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우리 사회 내부의 구조적인 문제들이 얽혀 ODA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는 날카로운 진단입니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ODA를 뒷받침해야 할 사회적 공감대와 가치 체계가 약화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한국행정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ODA에 대한 반대 여론은 2011년 11%에서 2023년 22%로 두 배나 증가했습니다. 이러한 지지도 하락의 배경에는 "우리 사회도 이렇게 불평등한데, 왜 남을 도와야 하는가?"라는 냉소적인 인식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특히 미래 세대인 청년층과 저소득층을 중심으로 확산되는 이러한 정서는, ODA의 사회적 기반 자체를 위협하는 가장 큰 구조적 위험 요소입니다.
여기에 더해, 과거의 국가 주도 성장 모델 이후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새로운 발전 방향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부재한 현실은, 국제사회에 어떤 가치를 기여할 것인가에 대한 비전의 부재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ODA를 실행하는 내부 생태계 역시 지속 가능성에 대한 질문에 직면해 있습니다. ODA는 모두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정책처럼 보이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누구도 절박하게 정책 개선을 외치지 않는 ‘약한 승자들의 연대’를 만듭니다. 예산이 계속 늘어나는 상황 속에서 치열한 고민과 혁신보다는 현상 유지에 안주하기 쉬운 구조인 셈입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 생태계를 떠받치는 사람들의 문제입니다. 개발협력 분야의 전문가와 실무자들은 경직된 관료주의와 열악한 보수 체계, 이상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극심한 직무 소진을 겪으며 현장을 떠나고 있습니다. 이는 장기적으로 한국 ODA의 전문성과 역량을 갉아먹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러한 사회적, 구조적 문제들을 정책으로 연결하고 해결해야 할 정치권의 역할은 사실상 부재한 상태입니다. 대한민국 주요 정당의 강령이나 대선 공약 어디에서도 ODA는 핵심 의제로 다뤄지지 않으며, 국회 역시 전문성과 관심이 부족해 정부 정책을 제대로 이끌거나 견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난 10여 년간 국회에 개발협력 관련 의원 연구단체 하나 없다가 2023년에야 포럼이 처음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정치권의 무관심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입니다.
마지막으로, 정부의 ODA 집행 방식은 고질적인 ‘분절화’의 덫에 갇혀 있습니다. 40개가 넘는 기관이 저마다 ODA 사업을 수행하며 부처 간 칸막이는 더욱 높아지고, 예산이 늘어날수록 비효율은 오히려 심화되고 있습니다. 이를 조정해야 할 국제개발협력위원회는 실질적인 권한이 없어 컨트롤 타워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연주 교수는 이러한 상황을 국제정치경제학의 ‘불가능한 삼위일체(Trillema)’에 빗대어 설명합니다. 개발협력 역시 ①국익 추구, ②협력국의 지속가능한 발전, ③글로벌 불평등 해소라는 세 가지 목표를 동시에 완벽하게 달성하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수립될 ‘4차 국제개발협력 기본계획’은 이 세 가지 목표 사이에서 우리가 무엇에 더 집중하고, 무엇을 전략적으로 선택할 것인지에 대한 깊은 사회적 논의와 결단을 내려야 할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고 그는 강조했습니다.
(본 글은 지난 4월, 한국행정연구원과 국제개발협력학회가 개최한 국제개발협력 정책세미나에서 정헌주 연세대 교수님이 발표한 '한국 국제개발협력의 국내 동학과 도전과제'를 재정리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