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국제개발협력 환경은 중대한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지속가능발전목표(SDG) 달성 시한이 5년 앞으로 다가왔지만, 팬데믹 이후 심화된 글로벌 복합 위기와 주요 공여국들의 정책 변화로 인해 개발협력을 둘러싼 불확실성은 그 어느 때보다 커지고 있습니다.
특히 미국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출범은 기존의 개발협력 패러다임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으며, 이는 한국을 비롯한 모든 개발협력 주체들에게 새로운 도전과 기회를 동시에 제시하고 있습니다.
팬데믹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기후변화, 분쟁, 식량 및 에너지 위기가 전 세계를 덮치며 SDG 달성을 위한 재원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UN의 최신 보고서에 따르면, SDG 달성을 위해 매년 5~7조 달러가 필요할 것으로 추산되지만, 전 세계 공여국의 공적개발원조(ODA) 총액은 이 수요의 5%에도 미치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다수의 공여국들은 자국의 경제 위기와 정치적 변화를 이유로 ODA 예산을 삭감하거나 동결하는 추세입니다. 유럽연합(EU)을 비롯한 다수의 유럽 국가들은 이미 2025년 이후 ODA 예산 감축 계획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이러한 양적 축소와 더불어, ODA를 자국의 안보 및 경제적 이익과 연계하려는 '전략적 원조' 기조가 강화되고 있습니다. 원조의 효과성과 효율성에 대한 공여국 내의 비판적인 여론이 높아지면서, 각국 정부는 한정된 재원을 자국에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집중하고 있습니다.
트럼프 2기 행정부는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 기조를 개발협력 분야에 본격적으로 적용하며 국제개발협력 지형에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미국 국제개발처(USAID)의 해체는 공식화 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 2025년 9월 2일을 목표로 USAID의 주요 기능과 인력은 국무부로 통합, 재조정될 예정입니다. 이는 개발 전문성을 외교 정책의 하위 수단으로 종속시키려는 의도로 풀이되며, 수십 년간 축적된 미국의 개발협력 전문성과 리더십 상실에 대한 우려를 낳고 있습니다. 이미 USAID 전체 사업의 약 86%가 취소 또는 해지 목록에 올랐으며, 추가적인 예산 지급 중단 조치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트럼프 행정부는 ODA 예산을 대폭 삭감하고, 인도적 지원과 같이 미국의 직접적인 국익과 연계된 분야에 자원을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특히 기후변화, 성 평등과 같은 가치 기반의 의제에 대한 지원은 크게 축소되었습니다. 이러한 미국의 정책 변화는 전 세계 ODA 총액의 약 30%를 차지하던 미국의 역할 축소를 의미하며, 다른 공여국들의 부담을 가중시키는 도미노 효과를 유발하고 있습니다. 마르코 루비오 국무장관은 "중국이나 인도와 같은 국가들도 국제 사회의 위기에 대한 책임을 분담해야 한다"고 언급하며, 미국의 역할 축소를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UN을 비롯한 다자 개발협력 체제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며 그 기능을 의도적으로 축소시키고 있습니다. SDG와 같은 글로벌 의제 설정 및 규범 형성의 구심점 역할을 해온 UN의 리더십이 약화되면서, 국제 사회의 공동 대응 역량 저하가 우려됩니다. 최근 OECD 개발원조위원회(DAC) 고위급 회의에 미국이 대표단을 파견하지 않은 것은 이러한 경향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주요 공여국들의 ODA 삭감과 전략적 기조 강화는 ODA의 역할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를 촉발하고 있습니다. WTO 사무총장은 개발도상국들에게 원조 의존에서 벗어나 무역과 투자를 통한 성장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에 따라 ODA를 민간 투자와 국내 재원 동원을 촉진하는 '촉매제'로 활용해야 한다는 논의가 힘을 얻고 있으며, 이는 향후 개발 재원 논의의 중심축이 될 전망입니다.
이러한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 ODA 예산을 늘려오던 한국의 기조가 전환점을 맞았습니다. 이재명 정부가 국방비 증액 등 국내 현안을 이유로 ODA 예산 축소에 돌입하고, 동시에 원조 집행의 효율성을 문제 삼아 KOICA(한국국제협력단)를 비롯한 원조 기관에 대한 감사를 강화하는 것은 한국 개발협력에 중대한 도전이자 근본적인 체질 개선을 요구하는 신호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국 개발협력이 나아가야 할 길은 무엇일까요.
양적 팽창이 어려워진 만큼, 이제는 '얼마나'가 아닌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에 대한 질적 고민이 절실합니다. ODA 예산 축소는 우리가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다는 현실을 직시하게 합니다. 따라서 한국이 비교 우위를 가지는 분야, 우리의 발전 경험을 가장 잘 전수할 수 있는 분야(예: 디지털 전환, 보건 시스템, 직업 기술 교육)를 중심으로 ODA 포트폴리오를 과감하게 재편해야 합니다. 이는 단순히 예산을 줄이는 것을 넘어, 한정된 재원으로 최대의 효과를 내기 위한 전략적 '선택과 집중'이며, '한국형 ODA'의 정체성을 더욱 명확히 하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분절화 해소: 여러 부처에 흩어져 중복과 비효율을 낳았던 원조 사업들을 통합하고 조정하는 강력한 컨트롤 타워 기능을 확립해야 합니다. 이는 정부의 개혁 요구에 부응하는 동시에, 사업의 시너지를 높여 예산 삭감의 충격을 최소화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성과 입증: 강화된 감사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해, 모든 사업 단계에서 성과를 측정하고 데이터를 축적하며 이를 투명하게 공개하는 시스템을 고도화해야 합니다. "우리의 원조가 수원국의 발전에 실질적으로 어떻게 기여했는가?"라는 국민과 정부의 질문에 구체적인 근거로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식 공유 파트너로의 전환: 재정적 기여는 줄었지만, 한국이 가진 가장 강력한 자산인 '압축성장의 경험과 노하우'의 가치는 변하지 않습니다. 수원국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제도 개혁, 정책 자문 등 지식 공유(Knowledge Sharing) 중심으로 역할을 재정립해야 합니다.
전략적 파트너십 확대: 우리 혼자 모든 것을 할 수 없으므로, 다른 중견 공여국, 다자개발은행(MDBs), 민간 부문과의 협력을 더욱 강화해야 합니다. 공동 재원을 마련해 대규모 사업에 참여하거나, 각자의 강점을 결합하여 시너지를 창출하는 방식으로 국제 사회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이는 재정적 한계를 극복하고 한국의 외교적 영향력을 유지하는 현명한 전략이 될 것입니다.
정부의 ODA 예산 삭감과 강도 높은 개혁 요구는 한국 개발협력계에 분명한 위기입니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과거의 양적 팽창 위주의 관행에서 벗어나, 내실을 다지고 ODA를 더욱 전략적이고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질적 전환'을 이룰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위기를 기회로 삼아 더욱 단단하고 신뢰받는 개발협력 선진국으로 거듭나기 위한 지혜와 결단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본 글은 지난 4월, 한국행정연구원과 국제개발협력학회가 개최한 국제개발협력 정책세미나에서 송지선 국립외교원 교수님이 발표한 '국제개발협력 환경변화와 한국에의 함의'를 재정리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