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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국 Oct 24. 2023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비겁하고 모순된 자아를 긍정하는 마음

시인과 촌장의 '가시나무'(2016년에 조성모가 리메이크했다)라는 노래를 좋아했다. 그 가사 중에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라는 구절이 있다. 난 예전부터 일관된다거나 한결같다는 말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좀 마음에 안 들었다. 내 마음이 한 가지가 아닌데 어떻게 진술이 일관되고 사람이 한결같을 수 있을까. 우습지만 우리 마음이 한 갈래가 아니고 여러 갈래임을 누군가가 확인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밥때가 되어 밥을 먹으러 나갈 때 고민에 빠지게 된다. 무얼 먹을지에 대한 고민이다. 짜장이냐 짬뽕이냐 하는 오랜 역사를 가진 고민부터, 한식을 먹을지 아니면 일식을 먹을지, 구이를 먹을지 아니면 탕을 먹을지, 물냉면을 먹을지 아니면 비빔냉면을 먹을지 끝없이 고민한다. 밥을 먹고 나서도 커피를 마실지 아니면 차를 마실지, 아이스로 먹을지 아니면 따뜻한 걸로 먹을지, 중간에 아이스크림 가게라도 보이면 아이스크림을 먹을지 말지... 끝없는 고민의 연속이다. 


이렇게 고민하는 이유는 내 마음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기 때문이다. 실은 많은 경우에 둘 다 혹은 셋다 먹고 싶기 때문이다. 메뉴의 선택뿐 아니라 우리의 마음은 종종 두 가지 상반된 지향을 동시에 갖는 경우도 많다. 때로는 좋은 일을 하면서 살고 싶다가 때로는 마냥 편하게 살고 싶다. 때로는 더없이 이기적이다가, 때로는 이타적이기도 하다. 한 사람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싫어하기도 한다. 혼자 있고 싶기도 하고, 같이 있고 싶기도 한다. 나만 잘 살고 싶기도 하고, 공존하고 싶기도 하다.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기도 하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가고 싶기도 한다. 남들에게 자랑할 만한 훌륭한 점도 있고, 너무 부끄러워 입 밖에 꺼내지 못하는 점도 있다. 


이렇게 많은 '나' 중에 어떤 (바람직한) 나는 '나'이고, 어떤 (바람직하지 못한) 나는 내가 아닌가? 수많은 '나'의 모습이 내 안에 있다. 바람직한 모습을 가진 나도 나이고, 바람직하지 못한 모습을 가진 나도 나이다. 이런 여러 모습을 가진 나를 때로는 받아들이기 어렵고 부정하고 싶을 때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인정하기 싫은 나의 모습도 모두 나인 걸 어떡하랴.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 수많은 '나'들을 긍정하지 못하면 자아는 통합되지 못하고 분열될 것이다. 스스로를 부정하는 한 그 삶은 괴롭고 힘들 수밖에 없다. 


인간은 존재 자체로 모순적이다. 내가 원해서 태어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런데 '왜 살아야 하는가?', '우리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나로부터, 타인으로부터 요구받는다. 그처럼 모순적이고 부당한 질문이 또 어디에 있을까? 그렇지만 그 또한 감수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숙명을 안고 살 수밖에 없다. 


아무리 착하게 살고 싶어도 무언가를 먹고 마시고 누리며 희생시켜야 삶이 지속된다. 공익인권을 위해 살더라도 매 순간순간 철저하게 공익적이고 인권적일 수 없다. 환경을 위해 살더라도 모든 면에서 친환경적으로 살지 못한다. '나'라는 존재를 어떤 틀에 가두지 마라. 어떤 면에선 모순되기에 내가 생각했던 '나'의 틀을 깰 수 있다. 이런 것들이 모순된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가장 비겁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니 우리 모두는 다 비겁하다. 


이렇게 비겁하고 모순된 '자아'를 긍정하고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좋겠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좋은 것'을 '지향'하고 이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나는 좋은 삶, 좋은 세상을 지향하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좋다. 나도 계속해서 좋은 삶과 좋은 세상, 이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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