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독한 기타맨 Jul 15. 2019

03.내가 원하는 것은 치즈가 아니라 덫에서 나가는 것

퇴사를 하겠다는 말에 돌아온 질문은 하나같이 '관두고 뭐할 건데?' 였다. 이말은 나의 퇴사 결심 과정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된 질문이기도 했다. 아내를 포함해 회사 동료들, 친구들 모두가 퇴사후의 계획을 요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난 딱히 이렇다할 계획이 없었다. 일부러 계획을 세우지 않은 것이 아니다. 사실 퇴사를 결심하기 오래전부터 언제가는 퇴사를 맞이 할 것이고 그러면 뭘 하고 살아야 하나, 뭘 해서 밥벌이를 해야하나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단지 퇴사를 결심할때까지도 아니 퇴사를 하고 나서도 한동안 그 답을 찾지 못했을 뿐이다.


아마 마흔이 넘어서면서부터 일것이다. 이런 고민을 시작한게. 그건 이성적인 판단에 기인한 것이 아닌 본능적으로 다가오는 듯했다. 누구랄 것도 없이 내 또래의 동료들도 똑같은 고민을 털어놓기 시작한 것이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스멀스멀 발 밑으로 기어다녔다. 이 회사가 내 인생 전부를 책임져 주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 알고 있는 사실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실제로 하나둘 회사를 떠나는 동료들이 늘어났고, 누구는 대기업 영업부로 갔다더라, A회사에서 다시 B회사로 옮겼다더라, 작은 회사에 임원으로 갔다더라하는 퇴직한 예전 상사, 동료들 소식은 남아 있는 사람들의 잡담의 단골 메뉴였다.


나도 뭔가 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때뿐이었다. 시쳇말로 상사에게 열 받은 날은 똥줄탄 강아지마냥 이런 저런 정보를 헤집고 다녔지만 일상의 상황은 그렇게 급할 것이 없었다. 시간이 날때도 그저 가십거리 기사나 찾아보고, 쇼핑몰을 기웃거리기 일쑤였다. 게다가 회사일이 바쁘게 돌아갈 때는 평생 회사 다닐 것처럼 또 일을 했다. 그렇게 답을 찾는 듯 안찾는 듯 몇 년이 훌쩍 지나가 버린 것이다.


퇴사 이후의 계획을 만들어 퇴사 할 수 있을까?


누구나 퇴사를 생각하면서 가장 많이 고민하는 부분이 바로 퇴사 이후의 계획일 것이다. 현재 직장보다 더 좋은 조건의 다음 직장이 있다면 이상적인 케이스중 하나이다. 다들 말하지 않는가? 다니면서 찾아라, 다음 회사가 정해지면 그만둬라. 틀린 말이 아니다. 가장 안전한 퇴사, 이직의 정석이다. 그래서 정년퇴직을 제외하고, 퇴사를 한다고 하면 첫 질문중 가장 많은 경우가 '어디로 가? 조건은 어때? 연봉은?' 이기도 하다. 나 또한 이전의 두번의 이직이 이런 식이었다. 다음 회사에 경력으로 합격을 하고 다니던 회사에 사직서를 던졌었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다시 남의 회사를 다니기는 싫었다. 이번 회사가 내 인생에 마지막 남의 회사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뭔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했다. 아내에게 허략을 얻기 위해서도, 아니 그보다 앞서 나 스스로가 퇴사를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서도 확실한 퇴사 이후의 계획이 있어야 했다. 그것이 실현 가능하든 그렇지 못하든 뭔가 계획이 있어야 퇴사를 결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전과는 다른 노력이 필요했다. 각종 전시회를 다니고, 경제뉴스를 챙겨 보고, 창업 관련 책을 읽고, 친구와 이런 저런 궁리도 해보았다. 하지만 반짝 떠오른 아이디어는 그보다 더 향상된 기능의 제품이 이미 나와 있었고,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하는 놀라운 창업 아이디어들이 실현되고 있었다. 세상에 쉬운 건 없다. 잠깐 몇일 고민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항상 어느 경우에나 표준화된 방법론이 있기 마련이다. 이직이 아닌 퇴직의 경우, 이후의 계획을 세우는 첫단계는 '내가 뭘 잘 할 수 있는지'와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를 먼저 정의하라고들 한다. 나라고 별수 있나. 전문가들이 그렇게 하라는데 해봐야지. 그래서 해봤다. 잘할 수 있는 것들을 대여섯가지 써놓고 내려다 보니 솔직히 부끄러웠다. 어느것 하나 내세울만한 것이 없었다. 어설프게 배워서 잘하는 것처럼 포장해 놓은 것들 뿐이었다. 번지르르한 겉포장을 벗기면 보잘 것 없는 잡기들만이 들어 있었다. 이어서 하고 싶은 것들을 써내려 갔다. 하고 싶은 것들은 잘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았다. 줄줄이 비엔나처럼 끝도 없이 달려나왔다. 하지만 그걸 다 써놓고 정리해 보니 하고 싶은 건 하나로 귀결되었다. 그 결론은 '아무것도 안하고 그냥 놀고 싶다' 였다. 예전 유해진이 나왔던 TV 광고처럼 '아무것도 안하고 싶다. 이미 아무것도 안하고 있지만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하고 싶다' 가 바로 내가 하고 싶은 것이었다.

  

이래서는 퇴사 이후의 계획은 고사하고 퇴사를 결정할 수도 없었다. 퇴사는 퇴사 이후의 계획을 찾는다는 핑계로 계속 미뤄지고 있었다. 이러다간 또 몇년이 흘러갈 판이었다. 우유부단하고 실행력 없는, 중도포기의 아이콘인 나는 결국 이렇게 회사라는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다 다음 문장을 발견했다. 어니 젤린스키라는 라이프 코치가 쓴 '일하지 않아도 좋아'를 3분의1쯤 읽었을 때였다.   


내가 원하는 것은 치즈가 아니라 덫에서 나가는 것이다.
- 스페인 속담


순간, 아~ 하는 탄식이 나도 모르게 새어나왔다. 그렇다. 나는 다음 치즈가 있는 곳을 알면 덫에서 나가야지 하는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덫에서 나가야 다음 치즈가 있는 곳을 찾을 수 있을터인데. 덫에 갇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채 다음 치즈가 있는 곳을 찾겠다니. 이런 바보 같은 경우가 어디있을까.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리고는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어쩌면 다음 계획을 만든다는 핑계로 회사 밖에 대한 두려움을 가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궁극적으로는 다음 치즈를 찾아야겠지만 지금 당면한 과제는 이놈의 회사라는 족쇄를 벗어버리는 것이 아니었던가. 머릿속 안개가 걷히고 있었다. 나보다 먼저 퇴사한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회사 밖이 지옥이라면 지옥 일은 지옥에서 찾아라.


아직은 치즈가 남아 있는 덫에 머문 채, 다음 치즈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거기까지 가기 위한 경로를 구상하고, 그 과정동안 버텨낼 체력을 키워서 덫을 홀가분하게 탈출하는 방법도 있다 (그렇게 한다고해서 다 성공하는 한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나처럼 우유부단하고, 실행력 떨어지며, 중도포기를 밥먹듯 하는 인간에게는 그렇게 하다간 그 덫에 머문 채 늙어 죽을 것이 분명하다. 한시라도 빨리 미로속에 내동댕이 쳐져야 허겁지겁이라도 뭔가를 해 나갈 그런 부류의 인종이 나인 것이다. 준비된 퇴사와 준비없는 퇴사, 어느것이 정답이라고는 할 수 없다. 각자의 성향과 기질에 따라 다른 선택이 필요할 뿐이다.


나는 다음 치즈에 대한 고민을 그만두기로 했다. 이후의 계획은 이후에 세우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퇴사를 결정했다. 비로소 아내의 '퇴사하면 뭐 할 건데?' 라는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었다. 나의 대답은 궁색하기 짝이 없었지만 솔직했다.

아직 잘 모르겠다고, 우선은 쉬고 싶다고, 천천히 찾아볼것이라고.




매거진의 이전글 02.그 어떤 두려움도 없다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