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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트럭 Jun 13. 2016

비틀즈, 레드제플린, 그리고 너바나  

포트럭이 들려주는 소소한 이야기 (3)

포트럭이 들려주는 소소한 이야기 편입니다. 프린스 추모글 이후 오랜만이네요. 모처럼만에 라디오헤드의 신보가 나왔길래, 음악이야기가 하고 싶어 졌습니다. 90년대에 고등학교, 대학시절을 보내신, 록음악을 좋아하셨던 분이라면 반가운 이름들을 만나게 되실 겁니다.

 





비틀즈로 알게 된 팝 음악의 세계, 그리고 레드제플린과 딥퍼플


어릴 적 나의 꿈은 음악평론가였다. 내 학창 시절은 음악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이유인즉슨, 음악을 좋아하는 삼촌 덕택에 일찍이 팝 음악에 눈을 떴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4학년, 비틀즈를 알게 됐다. Yesterday의 슬픈 선율은 그 어린 나이에도 가슴 깊이 와 닿았다. Hey Jude, A Day in the life, She's living home, Let it be, when I'm sixtyfour, I will... 비틀즈의 노래는 어느 하나 부족함이 없었다. 언제 들어도 질리지 않는 음악. 바로 비틀즈다.


영국 음악차트를 점령한 비틀즈의 역사적인 미국 진출 모습(JFK공항 도착 사진). 이를 두고 미국 언론은 브리티쉬 인베이젼(British Invasion, 영국의 침공)이라 표현했다. 결과는 아래와 같다.





과거 신해철이 넥스트 시절 표절 의혹을 받은 적이 있다. 그때 신해철은 이렇게 해명했다. "이미 비틀즈가 오선지에서 가능한 모든 멜로디를 다 써 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새로운 멜로디가 나올 수 없다."

그 정도로 비틀즈는 엄청난 창작력을 발휘해 곡을 만들어 냈다. 폴 메카트니라는 천재 작곡가가 곡을 만들면 존 레넌이라는 시인이 가사를 붙이는 식이었다. 그렇게 탄생한 수많은 명반들. 비틀즈에 대해서는 너무 할 말이 많아 나중에 별도로 글을 써야 할 것 같다.

비틀즈의 앨범들. 맨 오른쪽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는 음악잡지 롤링스톤 선정 500대 명반에서 1위를 차지한, 시대를 초월한 마스터피스다. 팝 음악 최초의 콘셉트 앨범이기도 하다.(출처 : 나무위키)


 

그리고 레드 제플린과 딥퍼플... Black Dog(레드제플린)의 인트로와 Highway Star(딥퍼플)의 키보드 연주는 내 가슴을 들었다 놓곤 했다.

레드제플린 : 좌측부터 존 보냄(드럼), 로버트 플랜트(보컬), 지미 페이지(기타), 존 폴 존스(키보드). 멤버 개개인이 레전드급 뮤지션이었던 록그룹. 존 보냄이 약물중독으로 사망하자, 리더인 지미 페이지는 미련 없이 그룹을 해체해 그야말로 전설로 남았다. 왜 해체할 수밖에 없었는지는 모비딕(존보냄 드럼 솔로곡)을 들어보면 안다. 우측은 최고 명반인 4집. 재킷에 아무런 글자도 없던 독특한 앨범 표지로도 유명하다. (출처 : 나무위키)


레드제플린의 영원한 라이벌 딥퍼플. 멤버 교체가 없었던 레드제플린과 달리 딥퍼플은 무수한 멤버 교체가 있었다. 그래서 멤버에 따라 딥퍼플 1기, 2기, 3기 이런 식으로 부른다. 우측은 딥퍼플 최고의 명반 "In Rock". 미국 대통령의 얼굴을 새긴 러시모어산을 패러디한 재킷이다. Speed King, Child In Time 등 불후의 명곡이 즐비하다. (출처 : 나무위키, 벅스)

 

두 밴드 모두 훌륭하지만, 개인적으론 레드제플린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레드제플린의 음반은 비틀즈 처럼 모든 앨범이 마스터피스다. 이에 반해 딥퍼플은 기복이 심했다. 레드제플린의 음악은 지금 들어도 세련되고 예리하다.






고교시절과 함께한 Heavy Metal  


고교시절은 헤비메탈에 빠져 지냈다. 당시 할로윈, 화이어하우스, 포이즌, 본조비 등 LA메탈이 유행이었지만 나는 그들을 말랑말랑한 대중음악으로 치부해 버렸다. 나의 우상은 메탈리카였다. 엄청난 속도감과 귀가 터질 듯한 강렬한 사운드는 마치 마약과도 같았다. master of puppet, battery, fight fire with fire 등을 쉴 새 없이 반복해 들었다. 지금보다 훨씬 못했던 성능의 이어폰은 금세 지지직 대며 파열음을 냈다. 지금도 내 청각이 좋지 못한 이유는 그 당시 싸구려 이어폰 탓이 크다.


1991년, 최고의 판매고(미국에서만 1천6백만장)와 그래미상에 빛나는 5집 "Black" 앨범 (앨범 재킷이 온통 검은색이라 블랙 앨범이라 부름)이 발매되고, 이듬해인 1992년 역사적인 모스크바 공연을 가지는데, 이 공연에는 수십만명이 운집했다고 한다. (80만명 이라는 설도 있는데, 용인시 인구가 한 80만명 되죠?^^;;)


메탈리카는 1998년 첫 내한공연을 가졌다. 전국의 메탈 팬 3만5천명이 운집해 메탈리카의 주옥같은 명곡을 떼창 했고, 이에 감동한 메탈리카는 8년 후인 2006년 두 번째 내한공연을 했다.


앞서 언급한 블랙 앨범 이후로 메탈리카는 음악 성향이 변해 스래쉬 메탈 팬들이 많이 떨어져 나갔다. 나도 마찬가지였고..  메탈리카를 대신해 슬레이어, 판테라, 메가데스 등 다른 메탈 밴드를 기웃거리다가 대단한 음악을 발견하게 되었다.


바로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Rage Against The Machine, 이하 RATM).

헤비한 사운드에 래핑을 기반으로 한 보컬은 정말 신선했다. 특히 자본주의와 기존 체제를 부정하고, 저항하는 가사는 당시 고3이었던 나의 피를 끓게 했다. 멤버들은 언행일치의 정신으로 사회운동에도 적극 나섰는데, 기타리스트 톰 모렐로가 하버드 출신인 덕택에 RATM은 행동하는 지식인의 이미지까지 더해졌다. (학벌 따지는 건 미국도 어쩔 수 없죠ㅎㅎ^^;;).

출처 : 나무위키


베트남의 위대한 고승 틱광둑 스님이 독재정권에 맞서 분신 공양한 모습을 앨범 재킷으로 쓴 RATM의 데뷔 앨범. 이 재킷 한 장으로 RATM의 음악적 지향점을 알 수 있다.

출처 : www.mtv.com


"Fxxk you,  I won't do what you tell me"가 반복되는 RATM의 대표곡 Killing in the name은 지금 들어도 가슴이 뛴다. 국내에서는 아이돌 그룹 HOT의 "열맞춰"가 Killing in the name 표절 의혹을 받아 유명해졌지요.(그 당시는 음악에 대한 검열이 심하고 해외 음악을 접하기 힘들었던 때라 의도적으로 해외 곡을 표절한 노래들이 많았던 것 같다. 요즘은 네티즌 수사대가 발달해 표절하면 바로 들통...)


RATM이 영향을 받은 밴드라고 해서 비스티보이즈의 음악도 찾아들었던 기억이 있다.   






대학시절 나의 우상 너바나 그리고 스매싱 펌킨스


너바나의 음악을 처음 들었던 건 고3 때였다. 친구가 앨범을 가져왔는데 어린 아기가 마치 물고기처럼 물속에서 달러 지폐가 걸려 있는 낚시 바늘을 향해 헤엄치는 모습이었다. 뭔가 RATM과 같은 저항의 스멜이 물씬 풍겨 구미가 확 당겼다.

헤비메탈의 시대를 지나 얼터너티브록의 시대를 활짝 연 상징과도 같은 앨범, 너바나 2집 "Nevermind"(출처 : 나무위키)


처음 들었을 땐 그저 그랬다. 이전에 듣던 헤비메탈 사운드와 너무 달라 이상했다. 그렇게 한동안 잊고 있던 너바나를 다시 듣게 된 건 대학 때였다. 2학년을 마치고 잠시 캐나다로 어학연수를 간 적이 있는데, 그때 TV를 틀면 나오던 노래가 바로 "Smells Like Teen Spirit" 였다. 뮤직비디오의 음울한 분위기와 커트코베인의 웅얼거리 듯, 절교하듯 내뿜는 보컬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너바나에 미쳐 지냈다.


너바나는 정규앨범이 단 3장뿐이다. 하지만 팝 음악사에서 그들의 존재감은 90년대 이후 록밴드 중 가장 강렬했다. 커트코베인으로 대변되는 너바나는 패배주의적 가사로 당시 젊은이들의 심정을 대변했으며 행동양식과 패션, 각종 예술분야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결정적으로 록음악의 주류가 헤비메탈에서 얼터너티브 록으로 넘어가는 계기가 된 밴드였다.


커트코베인은 자신들의 앨범이 메인스트림에서 유명해지는 것에 많은 부담을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다음 앨범은 더욱 언더그라운드적인 사운드로 꾸몄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대중들은 더 큰 열광과 지지를 보냈다. 대중의 환호에 익숙지 않았던 그는 코카인 중독에 빠졌고,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의 나이 27세였다.


커트코베인의 자살로 너바나가 더욱 신격화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같은 나이에 요절한 천재 뮤지션 지미 핸드릭스, 재니스 조플린과 비교하기도 한다. 그 주장을 완전히 부정할 순 없지만, 중요한 것은 앞서 얘기한 것처럼 커트코베인은 유명해지길 원한 것도, 돈을 많이 벌기를 원한 것도 아니란 점이다. 그저 자신의 음악을 하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오히려 대중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어 했다.


그래서 너바나의 음악을 들어보면 순수함이 느껴진다. 예전만큼 록음악을 듣지 않는 요즘도 즐겨 듣는 음반이 있다. 바로 너바나의 "MTV Unplugged In New York" 앨범이다. 공연 속 커트코베인의 얼굴은 참 편안해 보이는데, 이 앨범은 커트코베인 사후 발매되었다.

출처 : 나무위키



너바나의 음악을 한참 들을 때 더불어 즐겨 듣던 밴드가 바로 스매싱 펌킨스다. (우리말로 직역하면 골

때리는 호박?) 너바나에 커트코베인이 있다면 스매싱 펌킨스에는 빌리 코건이라는 천재가 있었다. 거의 모든 곡을 혼자 다 만들었다. 그리고 스매싱 펌킨스에는 일본계 기타리스트(제임스 이하)와 여자 베이시스트(다아시)가 있어 더 인상 깊었다.


스매싱 펌킨스의 명반 "Mellon Collie and the Infinite Sadness"는 더블 앨범으로 많은 곡을 수록하고 있음에도 미국에서만 900만 장이 팔리며 그래미상을 수상했다. 1979, beautiful, tonight tonight 등 너무나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곡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트랙인 "Zero". 내가 만약 곡을 만든다면 이렇게 만들고 싶다고 느낀 곡이다.






쓰다 보니 두서없이 적었는데, 이 정도로 끝내기엔 너무 하고 싶은 말이 많다. 다음번을 기약하며 오늘은 여기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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