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트럭이 들려주는 소소한 이야기 : 종교/역사 편
1, 2편에서 현장의 순례에 대해 살펴보았는데요. 3편에서는 현장의 순례가 가지는 의의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현장의 대당서역기는 당대의 모습을 아주 디테일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를 근거로 인도 지역의 유적 발굴이 활발하게 진행되었지요. 대표적인 것이 바로 룸비니(네팔)에 있는 아소카 왕의 석주입니다.
룸비니 라는 지역은 석가모니가 탄생한 상징적이고 신성한 곳입니다. 아소카 왕이 이 성지를 순례한 것을 기념하여 석주(돌기둥)를 만들었는데요. 그 석주에 바로 룸비니가 석가, 즉 싯다르타의 탄생지라고 새겨 있었습니다. 이후 석주가 파괴되어 룸비니의 역사는 세상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대당서역기에 바로 그 석주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고, 이를 근거로 발굴이 진행되어 석주가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룸비니는 석가의 4대 성지(태어난 곳, 깨달은 곳, 첫 설법을 한 곳, 죽은 곳) 중 하나로 불교의 가장 성스러운 장소로 인정받게 됩니다. 이후 룸비니 유적 발굴은 더욱 활기를 띄었고, 이제 많은 순례자가 방문하는 불교의 요람이 되었습니다.
현장의 순례는 많은 학승들에게 자극이 되었습니다. "퍼스트 펭귄"이라고 할까요? 엄두도 내지 못하던 순례길에 불을 당겼습니다. 일본 헤이안 시대 엔닌 스님이 대표적이었죠. 엔닌 스님이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의 여정을 기록한 "입당구법순례행기"는 현장의 "대당서역기"와 함께 세계 3대 기행문으로 손꼽힙니다.
그런데, 엔닌 스님의 "입당구법순례행기" 보다 더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니는 사료가 있습니다. 이것은 둔황석굴에서 발견 되었는데요. 둔황은 고대 중국의 수도인 장안에서 서역으로 가는 길목에 있어 많은 유적이 발견된 곳입니다.
(좌) 둔황의 위치 (우) 둔황석굴 입구
둔황석굴은 제국주의 시대 유럽의 고고학자들에 의해 도굴되었습니다. 480여 개의 동굴 중 17번째 굴에서 유명한 경서, 서화 등이 다수 발굴되었습니다. 상대적으로 관심을 받지 못하던 18번째 동굴에 있던 사료가 프랑스의 천재 고고학자 폴 펠리오에 의해 발굴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입니다.
혜초는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학승입니다. 국비로 당나라 유학을 갔을 정도로 뛰어난 천재였지요. 당나라에서 현장에 대해 알게 되고, 서기 723년 당나라 광저우를 출발해 4년간(723년~727년) 인도 5국(왕오천축국)과 지금의 이란, 우즈베키스탄, 터키에 이르는 머나먼 순례의 길을 떠납니다. 혜초는 우리나라 최초로 이슬람 문화권을 방문한 "세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왕오천축국전은 8세기 인도와 중앙아시아의 정치, 문화, 경제, 풍습 등을 알려주는 세계에서 유일한 기록물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유럽 최고의 기행문이라고 일컫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 13세기 후반에 집필되었으니, 무려 500년이나 먼저 저술되었네요.
그렇다면 "왕오천축국전"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요?
국립중앙박물관? 아닙니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최초로 발굴한 프랑스인 폴 펠리오가 고국으로 가져갔기 때문입니다. 2011년에 프랑스 국립도서관으로부터 대여하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를 한 적이 있긴 합니다. 안타까운 현실이지요.
왕오천축국전에 대한 사실 한 가지 더..
폴 펠리오는 왕오천축국전의 저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당나라의 고승이라고 생각했지요. 발굴 당시 훼손이 심했기 때문입니다. 혜초임을 밝혀낸 사람은 일본의 학승인 오타니 고즈이입니다.
혜초는 서역 순례를 마친 후에도 신라로 복귀하지 않았고, 당나라에서 경전 연구에 힘쓰다 생을 마감했습니다. 만약 혜초가 왕오천축국전을 가지고 통일신라로 돌아왔다면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요? 역사에는 만약은 없지만 말이에요.
이상으로 "현장, 순례" 3번째 이야기를 마칩니다. 다음 시간에는 "현장, 순례" 4번째 편,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