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제 기억력이 보통보다는 좋은 편이라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오늘도 회사 선배한테 왜 이것도 기억 못 하냐고 컁컁 짖어댔죠. 그랬더니 선배는 3개월 전에 한 번 이야기했던 것을 어떻게 다 기억하냐고 거세게 항의합니다. 그래서 저는 3개월 전에 한 번, 6개월 전에 한 번, 8개월 전에 한 번, 총 세 번을 같은 실수로 문제를 일으켰다고 가르쳐 드렸습니다.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3년 전에 여친한테 춘권을 직접 만들어 준 적이 있었는데요. 얼마 전여친이랑 춘권 먹을 일이 있어서 3년 전 춘권 만들었던 이야기를 하니 싹 잊어버린 거 있죠. 기름 뒤집어쓰면서 만들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깨끗하게 리셋이 될 수 있는 걸까요? 성질 나서 핸드폰 앨범을 다 뒤져서 3년 전에 만들고 찍어둔 춘권 사진을 보냈습니다. 이래도 네가 기억을 못 할 것이냐?
그러고 보니 저번 달 업무 성과 면담에서는제 상사가저에게 고백을 했었습니다. “네가 하는 말 중에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로 시작하는 말의 50%는 사실 기억에 없다. 미안.”대충 기억을 못 하고 있는 것은 눈치챘었기에 [전에도 말씀드렸듯이]로 시작하는 말은 설명을 다시 다 하고 있기는 한데 50%의 확률이었네요.
제가 기억을 잘한다고 해도 머리가 좋은 건 결단코 아니거든요. 단지 잊히지 않는 것뿐입니다. 가끔은 잊어도 될 만한 것들도 기억에 남아 있어서 상당히 귀찮습니다. 예를 들면 중학교 2학년 때, 옆에 앉은 애랑 수업시간에 오목을 두었는데 제가 졌어요. 진 건 괜찮은데 그 녀석의 승리의 표정이 정말 때려 주고 싶을 정도로 얄미웠습니다. 아주 그냥 씩 웃는데…! 그 얼굴이 아직도 가끔 씩 생각나서 갑자기 분하고 성질이 날 정도입니다. 그때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에 두었어야 했는데!
정말 귀찮은 기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튼 전 저 말고도 모두가 이 정도 기억은 다 하는 줄 알았거든요? 근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던 겁니다. 전 상당히 상황 기억력은 좋은 듯합니다. 남들이 다 기억을 못 한다고 하니 인정을 해야겠지요.
그래서 저도 저의 첫 번째 기억이 궁금해졌습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나의 최초의 기억은 무엇일까?
그렇게 기억을 거슬러 올라 저의 최초의 기억에 도달했습니다. 그랬더니 무려, 엄마 뱃속에 있던 태아 때의 기억이 있었습니다. 태아 이전의 기억은 없는 것으로 보아 확실이 이 기억이 최초인 듯합니다.
뱃속에 있을 땐 그곳이 누군가의 뱃속이라고는 꿈에도 생각도 못 했습니다. 그냥 그곳이 저의 세계의 전부이고 저만 존재했습니다. 양수도 뭐도 몰랐으니 미지근한 공간에 둥둥 떠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가끔은 저의 세계 밖에서의 소리도 들렸습니다. 아주 멀리서. 그래도 그것이 진짜 세계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리고 지금 생각해 보면 누군가의 애정을 느끼기도 했던 것 같아요. 그렇지 않고선 제가 무사히 태어 날 수 있을 리가 없었겠지요. 엄마와 전 한 몸이었으니까요.
신기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당시엔 오롯이 혼자만의 세계에 혼자서 존재하고 있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사실은 그때부터 혼자가 아니었던 거예요. 오히려 일생을 통 틀어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밀착할 수 없을 정도로 함께 있었던 것이라니. 저의 기억도 분명하고 실제로 일어난 과학적인 일도 사실인데 무지로 인해 기억과 사실이 다를 수밖에 없었네요. 이런 것을 보면 역시 기억과 사실은 다른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조심해야지.
그리고 그곳에서 무엇을 보았냐 하면, 밤하늘을 보았습니다. 태아는 엄마 뱃속에서 빨간색뿐이 인식을 못 한다고들 하는데 저는 분명히 별을 보았습니다. 검고 끝없는 우주 안에 제가 둥둥 떠 있었고, 은하수보다 더 많은 별들이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었어요. 밤하늘의 별을 보듯, 나만의 무한한 공간 안의 빛나는 별들을 바라보았습니다. 계속해서. 딱히 할 일이 없었기도 했고요. 그곳은 시간도 존재하지 않고, 배고픔도 없고 춥지도 않고 아무것도 없지만 모든 것이 있는 우주 그 자체였습니다.
제가 본 광경이 진짜 우주였는지 뭔지는 확실히 모르지만 우리는 모두 밤하늘의 별을 보며 향수를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지구 밖 우주에 나가고 싶은 인류의 욕망은 사실은 자신이 있었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욕구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