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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초란 Jan 18. 2022

4. 상품 발주는 예상 예측 예언?

너도 예언가 할 수 있어!

편의점에서 일하면서 제일 무서운 순간은 가게에 팔 물건이 없을 때이다.


24시간 문을 활짝 열고 있는 편의점. 문을 걸어 잠그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팔 물건이 없는 상태여도 문은 열어야 한다. 그런 참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3000 아이템이 넘는 상온, 냉온, 냉동의 각종 상품의 발주를 잘 컨트롤해야 하는데 이것이 초보 점장에겐 너무나 힘든 넘어야 하는 산 중에 하나이다.


부임 첫날, 삼각김밥부터 시작해, 도시락, 샌드위치, 면 종류, 디저트 등등 그러니까 오픈 케이스 안에 들어있는 모든 냉장용 상품의 발주 담당이 점장이라는 사실을 들었다. 사실 나는  점포 사원 때부터 카운터에 서는 것은 싫어했지만 발주 업무는 좋아했다. 내가 셀렉트 한 상품을 전략적으로 진열대에 배치해서 판매량을 늘리는 재미가 있었다. 이 상품을 이렇게 하면 잘 팔릴 것이라는 가설을 내세워서, 상품을 발주해, 직접 진열대를 만든다. 그리고 그에 따른 결과가 좋은 방향이던 나쁜 방향이던 어떤 식이라도 나온다. 게임하듯 '재미있는' 업무에 푹 빠져있었다.

하지만 이제껏 냉장 상품의 발주는 비교적 판매기간이 긴(리스크가 적은) 일정 종류의 도시락을 2주 동한 해 본 것이 전부였다.


상품 발주의 난이도는 냉동>>상온>>냉장 상품 순으로 어렵다. 왜냐하면 오른쪽으로 갈수록 판매기간이 짧아져서 가게 안에 비축할 수 있는 재고량이 적어지기 때문이다. 특히 편의점 하면 떠오르는 삼각김밥, 도시락, 샌드위치, 디저트 등등은 매상의 약 4분의 1 정도를 차지하면서도 판매기간이 대부분 1일이다.

그렇다. 발주 난이도 맥스의 냉장 상품이 바로 첫날 출근해 점장이 담당하는 발주 상품이라 소개받은 상품군이다.


판매기간이 짧다고 하면, 그냥 오늘 발주한 상품이 내일 온다고 생각하면 속 편할 것 같은데, 그렇게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다. 냉장 상품은 하루에 세 번 발주한 상품이 들어온다. 하루에 한 번 오면 될 것을 왜 세 번 씩이나 시간의 텀을 두고 납품을 하는 가를 이해하기 위해선 우선,  ‘편의점’이란 소매업의 이해가 필요하다.


첫째. 똑같은 시간에 물건을 들여오면 상품 폐기 시간도 똑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다음 납품이 들어오는 시간까지 진열대에 상품이 하나도 없는 절망적인 사태가 발생한다. 거의 모든 가맹점이 24시간 영업이므로 폐기 텀 없이 상품이 들어오는 것은 힘들다.

둘. 이와 같은 참사를 줄이기 위해 하루에 여러 번(편의 좀 회사, 지역마다 횟수는 다르다.) 납품을 하는 것으로 폐기 시간이 짧은 상품의 진열대를 다음 납품 때까지 컨디션 좋게 유지할 수 있다.(나는 편의점 회사에 취직하기 전까지 편의점이 단순 소매업이라 생각했는데 큰 의미로는 물류 사업이기도 하다.)



이 세 번의 납품 찬스를 잘 이용해서 진열대에 항상 보기 좋고 폐기상품을 최소화할 수 있는 숫자를 찾아내는 것이 발주 스킬이다. 즉, 초보 점장이 이것을 잘 할리가 만무했다.


상품이 오고 진열을 하고 진열대에 상품이 없어지고 다음 납품시간까지 발을 동동 거리다가 상품이 오면 진열하고 금방 없어지고 “점장~ 삼각김밥이 하나도 없어요~” 네, 저도 알고 있어요.

반대로 너무 많이 발주하면 상품이 진열대에 차고 넘치는데 또 납품이 오고 아르바이트 아주머니가 “점장~ 더 이상 안 들어가요~.” 네, 저도 눈이 있으니 알고 있습니다.


엉망인 진열대를 보면 너무너무 창피하고 분했다.

상품의 한 달치의 판매량, 전 주의 판매량, 작년의 판매량, 손님의 숫자, 날씨, 지금의 진열대... 발주는 각종 데이터를 보고 분석하는 근거 있는 예상이라고는 하지만 결국엔 내일 이 시간에 필요한 상품의 개수를 때려 맞추는 일이다.

예상입니까? 예측입니까? 예언입니까? 내가 예언가입니까?


작년 데이터는 하나도 도움이 안 되는 것이 작년 이맘때와 비교해서 손님이 약 1.5배나 늘었다. 그야말로 진짜 때려 맞춰야 하는 상황에서 신상품은 매주 쏟아져 나오고 본사에선 A 신상품 힘 좀 넣어보자고 일괄적으로 몇 개 이상 발주! 이런 지령이나 내려오고 솔직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패닉에 빠진 난 갑자기 억울해졌다.

발주는 좋아하는 업무 중에 하나였다. 좋아하던 일이 싫어지는 것은 싫었다.

그래, 갑자기 모르는 가게의 이렇게 많은 양의 진열대를 책임지게 되었으니 이건 불운의 사고이다!

그래도, 해야 한다. 난 카운터에 서서 손님맞이하는 것을 싫어하는 점장이니까!


진열대를 엉망으로 만든 지 일주일째에 굳은 결심을 하고, 매일 출근해서 가게의 모든 진열대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출근해서 찍고, 상품 들어오면 진열하고 또 사진 찍고, 점심시간 끝나고 다시 사진 찍고, 다음 상품 들어오면 진열 전에 찍고, 진열 후에 찍고, 퇴근 전에 또 찍고.


데이터를 보면서 내가 발주한 숫자와 실제 진열대를 보고 발주 연구하기를 한 달.

아르바이트분들도 처음엔 발주가 엉망인 나를 놀리는 듯하였으나 매일 이 짓을 하는 모습을 보고 격려를 해주기 시작했다.


 "점장! 오늘은 괜찮은 진열대인 것 같아요!"

발주 못하는 초보 점장에서 발주는 잘하는 초보 점장으로 승급했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같은 지점의 직영점이 20 점포쯤 됐는데 매주 상품 폐기 랭킹을 메겨서 점장 메일에 보내준다. 매번 진기한 숫자를 달성하니 옆 가게 점장한테 가게로 전화가 와서 비결을 가리켜달라고 할 정도였다. 근데 내가 이제 것 썼듯이 비결이고 뭐고 없고 그냥 무식하게 진열대와 싸운 결과였다.


그리고 발주를 가르치는 점장으로 승급하게 된다.

내가 어느 정도 달인이 되었으니 이제 하산해서 제자 양성에 힘을 써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톱니바퀴 맞추듯 잘 굴러가면 정말 재미있고 자신이 돌보는 진열대가 생기니 가게에 대한 애착도 증가하는 업무라고 생각하면 역시 점장이 다 껴안고 있을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재미있는 것은 모두가 할 수 있게 되면 더 재미있지 않을까?

다음 가게로 이동하기 전까지 가게의 모든 아르바이트생이 발주 업무와 진열대 관리를 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나만의 목표가 되었다.

(갑자기 부임해 여기서부터 저기가 다 점장 발주 영역이란 소릴 들을 내 다음 후임을 위해서라도)


발주 가르쳐주겠다고 하면 무섭다고 도망가는 가게의 아르바이트생을 붙잡고

”예상? 예측? 예언? 너도 예언가 할 수 있어!”

라고 꼬드긴 것이 한 명, 두 명.

결국엔 나의 이동 지령 전에 가게의 거의 모든 아르바이트생들이 뭐라도 한 군데는 발주를 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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