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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개인적인 사연으로 이야기를 시작할까 합니다.
오늘의 주제와 어떤 관련이 있을까 생각해보시면서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제가 처음 영어라는 존재를 '인격적으로 만난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입니다. 표현이 좀 웃길지 모르지만 영어라는 언어가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것이 내 삶과 연관된 적은 전혀 없었거든요. 언어가 내 삶에 파고 들어온 경험이라 해야 할까요. 어느 날 저와 나이가 같은 사촌이 제가 음료수를 마시는데 갑자기 이러는 겁니다.
"에프, 에이, 엔, 티, 에이"
'잉? 뭐라고?' 뭔 소리를 하는 건지 당최 알아듣지 못하는 제게 사촌은 제가 마시고 있는 음료를 가리키며 다시 한번 말했죠.
"에프, 에이, 엔, 티, 에이"
아시겠나요? 제가 당시에 무슨 음료수를 마시고 있었는지? " F.A.N.T.A " 네 맞습니다.
저는 환타 음료수를 마시고 있었고, 아마도 이제 막 알파벳을 알아가기 시작했던 사촌은 거기 쓰인 글자를 읽은 것 같습니다. 지금 돌이켜보건데, 아는 글자들을 읽는 것이 무척 재밌을 때였겠지요.
저는 쟤가 아는 걸 내가 모른다는 큰 충격에 빠졌고, 그 겨울방학에 영어공부 과외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A에이, B비, C 씨, D디 를 공책에 쓰면서 다 외우니 뭔 글자가 자매품도 아니도 또 있다고 하더군요. 왜 한 번에 안 가르쳐주나 하면서 열심히 썼지요 소문자 a에이, b비, c 씨, d디.. 무자게 헷갈렸습니다. 그러고 나자 나오는 I am a girl. 그동안의 실력을 발휘해 읽어봅니다. 아이 에이 엠 에이 쥐 아이 알엘.(이렇게 유창하게도 아니고 그 와중에 몇 개는 버벅거리니다.) 선생님은 그렇게 읽으면 안 된다고 합니다. '아이 엠 어 걸. 아이 엠 어 걸.' 선생님을 따라 합니다. 그리고 다음 시간에는 단어 시험을 본답니다. 집에서 단어를 외우죠. 손으로 쓰면서.. 가끔 입으로 중얼거리기도 합니다. 쥐 아이 알엘, 쥐 아이 알엘, 걸, 걸..
이제 오늘의 파닉스 본론을 시작해 볼까요. 자, 제가 말한 girl이란 단어의 글자 이름은 쥐, 아이, 알, 엘입니다.
그리고 글자 소리는 걸~(이라 쓰고 그~얼이라 발음해야 비스꾸레하게 들리는..) 우리가 말하는 영어를 읽는다 라고 하는 것은 girl의 글자 이름을 알려는 것이 아니라 글자 소리를 알려는 것입니다. 이 글자의 소리를 알아 읽는 것이 바로 파닉스이지요.파닉스를 알아야 girl을 걸~이라고 읽을 수 있고, FANTA를 환타라고 읽을 수 있으니까요. ABC 노래 아시죠? 그건 에이, 비, 씨, 디, 이, 에프, 지~ 하고 소리를 가르치는 노래입니다.
파닉스를 가르치려면 이런 노래를 해야죠. A says 애애애, 애플(apple) / B says 브브브, 베어 (bear)...
그런데 이게 하다 보면 쉽지 않습니다. F가 나오면 윗니로 아래 입술을 물고 소리를 내야 하고 Z 엄청 벌레 날개가 즈르르하는 것 같고 아무튼 한국어에선 듣도 보도 못한 음가들이 있는 겁니다.
파닉스를 가르쳤을 때 무조건 수업의 시작은 ABC Song을 불렀습니다. 교실에 있는 글자나 교재 안에 적혀있는 A부터 Z까지 손가락으로 꼭꼭 짚어가면서요. 그리고 조금 지나고는 A says aaa apple 하는 파닉스 송을 추가로 더 부르고요. 미국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모국어가 영어인 아이들도 파닉스를 배울 땐 장사가 없습니다. 사진 속 저 무지개 모양의 알파벳판과 글자들은 참 유용했습니다. 결국 상징 기호인 알파벳을 자꾸 눈으로 봐서 익히는 것과 그것에 내는 소리를 많이 듣고 따라 하는 것이 기본이 된 상태에서 파닉스 규칙을 아는 것이 파닉스 수업의 자연스러운 과정인 것입니다.
바꿔 말하자면 문자에 대한 인지와 소리에 대한 인지가 같이 가지 않은 파닉스 수업은 그만큼 효과가 없고 심하게 말하면 무의미할 수도 있다는 것이죠. 제가 처음 학생들을 만나 인터뷰를 다보면 안타까운 경우가 있습니다. 10개월을 한 학원에서 파닉스를 배웠대요. 그런데 당최 영어가 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어머니는 학원을 바꾸고 싶어서 찾아오시는 겁니다. 그럼 저는 말씀드리죠. '지금 파닉스 수업을 다시 들으면 10개월 전의 수업을 처음부터 다시 듣는 거예요. 파닉스 수업은 한 군데서 들으면 거기서 웬만큼은 끝내셔야 해요. 다 비슷합니다. 그런데 지금부터는 영어를 많이 들려주세요.' 결국 파닉스 수업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은 가르치는 선생님이 못해서도 아니고, 우리 아이가 '영어에 재능이 없어서'(세상에 제일 말도 안 되는 표현입니다)는 더더더 아니고 문자와 소리의 규칙을 조합해야 하는데, 어느 한 쪽이 인풋의 발란스가 맞지 않아서이기 때문이 더 많습니다. 한국에서 가르쳤던 학생들의 경우에는 소리가 부족해 어려웠고, 미국에서 가르쳤던 학생들의 경우에는 문자가 부족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 두 가지 다 개선되어야 하지만 후자 쪽이 조금 더 해결되기 쉽습니다. 왜냐하면 전자는 소리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를 학생의 머리에 넣어주는 그 과정이 굉장히 오래 걸리기 때문이죠. 그래도 영어권에서는 아이가 파닉스를 떼고 혼자 읽는 과정을 로켓을 쏘아 올리는 것만큼이나 어렵다고 하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니 한국에서 영어를 배우는 아이들이 파닉스가 힘든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어린 시절부터 DVD, 동영상, 노래 등으로 영어 소리를 많이 들었다면 이 과정이 짧아지는 것은 당연하고요. 또 하나 자연스럽게 원어민처럼 영어를 배우기 위해서 파닉스는 '지양'하는 흐름도 볼 수 있었는데요. 보시다시피 원어민들도 배우지 않으면 못 하는 것이 decoding입니다. 모든 영어를 100% 파닉스 규칙을 적용해 읽게 하는 것도 숨 막히지만 아예 "파닉스 수업 NO"하는 Zero Phonics를 주장하는 것보다는 적당한 시기에 아주 기초적인 음가를 알려주어 학생의 리딩스킬에 도움이 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일 것입니다. (요 부분은 미국에서도 학생들을 대상으로 많은 연구를 했던 것이고 그 결과 Bisic Phonics가 가장 효과적이라는 논문들도 나왔고요.)
그럼 오늘의 대주제 "우리 아이 파닉스 언제 가르쳐야 할까요?"의 답은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이런 질문을 받으면 늘 이렇게 말합니다. "네 파닉스는 초등학교 입학한 8살 셋째 주 목요일 오후 3시부터 가르치세요." 잉? 무슨 소리냐고요? 저의 다소 얼토당토않은 이 대답은 그만큼 파닉스를 언제 시작해야 하냐? 언제 해야 안 늦냐? 뭐 그런 질문에는 답이 없다는 뜻도 되겠습니다. 위에서 장황하게 설명한 결론은
"파닉스는 충분히 아이 귀로 영어 소리가 들어가고, 눈으로 문자를 많이 접했을 때 그 두 가지를 접목하는 것을 도와주기 위한 것이고 언제 가르칠지 그 시기는 철저히 내 아이의 현재까지 인풋의 양에 맞추어 시작하는 것"
이라는 거죠.
우리 아이만 늦은 것 같아서 조바심 나시나요?' 우리의 아이들이 빨리 걷기 시작했다고 운동 신경이 뛰어나게 좋거나, '엄마'를 돌 전에 말한 아이가 고등학교 국어 점수가 높다거나 하지 않은 것처럼 파닉스가 늦어서 영어를 못하게 되진 않습니다. (물론 영어는 자주 그 바다에 빠져서 놀아본 친구가 잘하고 자신감을 갖긴 하다는 단서가 붙습니다.) 중요한 것은 옆집 아이가 파닉스를 다 떼어서 보면 영어를 줄줄 읽어서 부러워서 파닉스 강좌를 등록하거나 선생님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아이가 다양한 방법을 통해 영어 소리를 듣고 글자를 익하는 게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마치 아이가 모국어를 배울 때 옹알이 과정을 지나며 소리를 엄청 듣고 따라 하고 엄마랑 세상을 탐험하며 간판이며 자기 이름이며 눈에 익숙하게 익히다가 어떤 한순간에 글자를 알려주면 금방 배우듯이 말이죠.
이게 제가 말로 하던 강의를 글로 옮겨놓으니 전달력이 많이 떨어지는 것 같네요.
유튜브 동영상 강의로도 봐주세요 ^^
https://www.youtube.com/watch?v=MJDAgsr-vQw
암튼 오늘의 결론을 조심스레 지어봅니다.
영어를 읽게 하고 싶으세요?
그래서 파닉스를 시작하시려 하나요?
수영을 할 때 음파 음파 숨쉬기를 하고
벽 잡고 발차기를 한 후 수영을 배우듯
다양한 소리를 들려주고, 문자를 보여준 후
파닉스를 시작하시는 것이 어떨까요?
-2018 나유 나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