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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도 Aug 26. 2020

당신의 마음을 알기 때문에 알고 싶지 않아요

지배하려는 자와 식충식물

 나쁜 운명



이 세상은
나쁜 사람들이 지배하게 되어 있다.
(그야 불문가지)
'좋은' 사람들은 "지배'하고 싶어 하지 않고
'지배'할 줄 모르며 그리하여
'지배'하지 않으니까.
따라서 '지배자'나 '지배 행위'가 있는 한  이 세상의 불행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정현종 시인






참 좋아하는 시다.

난 이 시를

사람과 사람의 관계적인 측면에서 받아들였다.


관계적인 측면에서 타인을 지배하려는 자를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으로 타인의 생각을 물들이려고 한다.  일종의 점령 욕구다.  타인의 머릿속을 점령하고 나서 그 안에 자신을 심으려고 한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자신이 상대보다 우위에 있다고 믿는다.  심지어 자신이 상대방을 지배해야 세상의 질서가 잡힌다고 생각한다.

국가 간 관계로 보자면, 단순한 참견이 내정간섭이라면, 지배하는 것은 식민지화하는 것이다.

단순한 참견은 그 최종 목적이 화자의 이익과 무관할 수도 있지만, 지배한다는 것은 청자를 점령하는 것이 화자에게 직접적인 이익을 가져다준다.


그들의 특징은  늘 상대방을 바꾸려 하고 그 도구로 지시와 비난을 사용한다.

"넌 그거밖에 못해?" " 도대체 지금까지 한 게 뭐야?" "이걸 지금 한 거라고 한 거야?"

이런 무례한 말을 서슴지 않고 배설하면서 그 말이 상대방을 바꾸게 하는 힘을 지녔다고 착각한다. 그들이 사용하는 비난으로 상대방이 무기력해진다는 사실은 모른 채.





27년 전 , 대학 졸업과 동시에 모그룹 기획실에 입사했다. 그 당시 우리 부서 부장님의 화법은 지시, 비난, 비교가 주를 이뤘다. 부장님 자신은 자신이 부서 직원들을 잘 관리하고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부장님 방에 들어갔다 온 직원들은 그날 오후일을 접고 시간만 보내다 집에 갔다. 나 또한 그랬다. 부장님의 비난을 듣고 내 자리에 돌아와서는 저녁 약속을 잡고 화장을 고치는 일로 시간을 때웠다. 부장님의 비난만큼 화장에 공을 들였다. 그 길이 우리의 노력을 폄하한 부장님에 대한 가장 소심하면서도 통쾌한 복수였다.

반면 우리 부서 총괄 관할을 하는 이사장님과 면담이 있는 날은 달랐다. 이사장님 말씀을 듣고 나오면 자리로 돌아와 자세를 가다듬고 일에 몰입했다. 갑자기 전에 없던 애사심이 불타오르며 이 회사에 뼈를 묻으리라는 생각으로 일에 전념했다. 

"00 씨 지난번에 준 자료 분석이 아주 큰 도움이 됐어요."

일하다가도 히죽히죽 삐져나오는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불행하게도 이사장님보다는 부장님을 매일 만나야 했던 나는, 1년 만에 직장을 관두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 당시 지배에서 벗어나는 길은 그것이 유일했다.


회사생활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상대방을 비난으로 지배하려는 자들을 볼 수 있다. 단지 회사라는 공적인 관계가 아닌 사적인 관계이기 때문에 그 지배관계를 인식하고 벗어나는 데 더 오랜 시간이 걸릴 뿐이다.


그들은 비난이라는 무기로 상대방을 공격해 점령하다가 힘이 부족하다고 느껴지면 비교라는 다음 무기를 들고 나선다.  주로 "더라"화법으로 자신의 주장하는 바와 일치하는 사례를 끌어와 던진다.


 "내 친구 며느리는 시어머니께 매일 전화한다더라."

 "내 친구 남편은 화장실 청소는 꼭 직접 한대. 와이프한테  그것(?)까지는 시키기 싫다고." 

 "내 친구 아들은 학원도 안 다니고 공부하더니 장학생으로 붙었다더라."


사례 제시를 가장한 지배행위다. '저 사례를 따라 너도 해'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여기에서 파생된 엄친아, 아친남(아내 친구 남편), 시친 며느리(시어머니 친구 며느리)등이 있다. 이들은 결국 지배자인 화자의 사례에 등장해서  청자의 태도를 바꾸려는데 이용되고 사라진다.




작은 아이가 초등학생 때 가장 심취했던 식물은 식충식물이었다. 그 당시 우리는 남양주에 있는  농장까지 가서 식충식물을 구경했다.  남편이 운전하고 아이와 나는 뒷좌석에 탔다. 한 시간 넘게 걸려 도착한 농장 비닐하우스에는 각종 식충식물이 줄 맞춰 서있었다. 비닐하우스 의자에 앉아 심드렁하게 휴대전화를 보는 나와 남편과 달리, 아이는 그 안에서 꼬박 한 시간을 놀며 식충식물을 담아왔다.


외형적으로만 봐도 '저 식물은 동물성 식물이구나'알 수 있었다.  네펜데스라는 식충식물은 사람의 혈관처럼 보이는 빨간 줄이 줄기에 있었다. 파리지옥은 동물에서 볼 수 있는 털이 보송보송 나있었다. 보통 수동적인 식물과는 달리 식충식물은 생김새에서부터 동물이 되려다 주저앉은 식물 같았다. 


우리 집에 들어온 지 며칠 지난 식충식물의 잎사귀에는 집안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던 날파리가 달라붙어있었다.

식충식물 종류에 따라 먹이를 유인하는 방식이 달랐다. 벌레잡이 제비꽃 식충식물은 밝은 꽃으로 먹이를 유인하고, 끈끈이주걱은 끈적한 점액 또는 접착제로 유인한다. 파리지옥은 방아쇠 역할을 하는 털로 먹이를 불러 모은다.

그 모습을 보며 지배욕이 강한 지배자형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끝없이 타인을 조정해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려는 지배자형 인간과 날파리를 유인해 자신의 잎사귀로 잡아먹는 식충식물은 흡사했다.


난 지배자형 인간을 닮은 식충식물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다른 식물을 키울 때와 달리 베란다에 잘 나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유난히 식충식물에 관심을 모으게 된 일이 있었다.

집안에 들어온 모기 한마디로 잠을 설친 날 아침. 별로 예뻐하지도 않던 식충식물에 다가가 봤다. 혹시나 식충식물이 모기를 잡아먹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감에서였다.  그런데 식충식물 입사귀를 아무리 뒤져도 모기의 흔적은 없었다.

식충식물의 사귀에 들러붙어 죽은 날파리와는 달리, 밤새 귓가를 윙윙대던 모기는 멀쩡하게 살아있었다.   모기는 식충식물이 있는 발코니 하얀 벽에 붙어있었다.  그 태연한 모습이 얄밉기도 하면서 위대해 보이기도 했다.

모기는 제비꽃 식충식물의 밝은 꽃에도, 끈끈이주걱의 접착제에도 유혹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타인을 지배하려는 이에게 가장 취약한 대상은 인정 욕구가 강한 사람이다. 그들에게 타인으로부터 비난받는다는 사실은 치명적이다. 인정과 칭찬에 목말라하는 이에게 비난은 허용할 수 없는 것이다. 비난을 인정으로 바꾸기 위해 부당함을 잠시 미뤄둔 채, 부단히 자신의 노력을 채워 넣는다.   

대부분 며느라기 시절의 며느리들이 시어머니의 비난에 더 분발하는 게 이런 경우다.  비난을 듣고 불쾌해 주저앉았다가도 다시 일어나 나아간다. 그러나 그 나아가는 방향의 도착지는 지배하려는 이가 원하는 곳이다.   


지배하려는 자의 지배욕을 내가 줄이거나 없앨 수는 없다.

그렇다면 지배하려는 자로부터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회사 상사나 가족 어르신의 지배를 벗어나는 것은 사실 쉽지 않다. 회사는 생계와 관련돼 있어서 지배를 벗어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가족 어르신도 마찬가지다. 그 끈은 지켜내야 하는 영역이다.


식충식물의 타깃인  모기가 그 유인물의 유혹에서 벗어나서 지배받지 않는 것을 보며 깨달았다.

모기가 식충식물의 유인물에 매혹돼 끌려가지 않았던 것처럼,

지배받고 싶지 않으면 지배자를 향해 솟아오르는 내 안의 인정 욕구를 잠재우면 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 안의 인정 욕구를 소멸시키는 것뿐이다.


표면적인 관계는 유지하면서 나를 지배하려는 자에게서 지배당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다.

지배하려는 자의 마음을 애써 읽지 않는 것,  은근히 통쾌한 구석이 있다.


주위사항!!  부작용으로는  그다지 발전적이지 않은 사회적 지위나  가족 내 관계에 이를 수 있다.



<이미지 출처:pixabay> <식물이름: 파리지옥>


이 글은 3월에 출간된 책  <바람에 흔들리게 창문을 열어주세요> 에 일부 수정돼 실려있습니다.

 

<바람에 흔들리게 창문을 열어주세요> 출간 이야기 (brunc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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