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초등학교 입학 뒤 한 두 달 안에 학부모 모임을 소규모로 결성한다네. 그때 어느 모임에도 들어가지 못하면 학부모 관계에서 소외되는 거지."
여성복 매장에서 만난 친구 P는 매장 안 진열된 옷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했다.
P는 검은색 트위드 재킷을 보고 잠시 주춤하다 꺼내 들었다. 매장 전신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이거 어때?" 그제야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평소와는 다르게, 전투적으로 관계를 쟁취하고야 말겠다는 의지로 P의 두 눈은 번뜩였다. 그런 P의 모습이 낯설어서였나? 그 옷이 P에게 어울리는지 안 어울리는지 헷갈렸다.
그날 P를 만난 것도 P가 아이 초등학교 입학식 날 입을 옷을 사는데 봐달라고 해서 만났던 참이었다. 아이 옷이 아닌 엄마옷 말이다. 그 모습이 의아했지만 딱히 반론을 펼만한 경험치가 없어서 그냥 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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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친구들 중에서 제일 일찍 결혼한 나는 그 당시 큰아이가 중학생이었다. 하지만 큰아이가 초등학교에 다니는 내내 지정 봉사 이외에 학부모 반모임에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학부모 관계에 관해서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P는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면 엄마도 인기 있는 학부모로 탈바꿈해야 하는 것처럼 생각했다. 열정과 노력 덕분인지 P는 한동안 아이 친구 엄마들하고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날마다 점심도 같이 먹고, 주말에는 아이 친구, 그 엄마들과 같이 전시회, 박물관등을 견학하고 와서 사진을 보여주곤 했다. 만날 때마다 그들의 이야기를 해서 난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들을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것 같았다.
1년쯤 지난 어느 날 저녁, P한테 전화가 왔다.
"아무도야. 넌 작은 아이 내년에 초등학교 입학하면 절대로 학부모하고 어울리지 마. 어휴 사람이 친하다 돌아서니 무섭네 무서워. 친했던 아이 친구 엄마가 여기저기 내 험담을 하고 다니는데 괴로워 죽을 것 같아. 나 학교 다닐 때도 안 당했던 왕따 된 것 같아."
P는 학부모 관계에서 오해와 상처를 받아서 한동안 그 동네 나홀로족이 됐다.
P뿐 아니라 다른 친구들의 학부모 관계 경험담을 모아봐도 학부모로서의 만남이 그리 쉽지 않은 관계인 것 같았다. 쉽게 가까워졌다 멀어지기도 하고, 완전히 돌아서기도 하는 관계. 여기저기서 학부모 대 학부모로 만난 사람한테 상처 받은 이야기가 들려오곤 했다. 언뜻 봐도 결혼한 여자들에게 있어서, 시댁과의 관계 다음 순위에 등극할만한 고난도 관계로 보였다. 멀면 흠이 되고 가까우면 탈이 되는 관계.(어쩌라고)
다음 해, 다소 부정적인 사전 정보를 입수한 채, 늦둥이 둘째가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큰아이 때와는 달리 반모임에도 나가고, 생일파티에도 나가봤지만 P의 조언 때문인지. 그들을 만날 때마다
'무장해제하면 안 돼." "언제 돌아설지 몰라" 명심해 "아이 친구 엄마는 내 친구가 아냐."
이런 말들이 늘 귀에서 울렸다.
그래서인지 그 모임만 다녀오면 물에 젖은 솜처럼 몸이 소파에 들러붙었다. 친구를 만나고 온 것과 다르게 너무 피곤해서 모임 후 소파에서 까무룩 잠이 들기 일쑤였다. 다른 사람 보기엔 대낮에 한가하게 브런치나 먹고 있는 모습이 한낮 마당에서 낮잠 자는 개만큼이나 팔자 좋아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나한테는 모임에 앉아있는 동안이 회사에서 주요 미팅을 위해 외근 나간 것 같았다.
친구의 조언으로 모임전, 나름 보호장치로 갑옷을 덧입고 나갔기 때문일까?
모임에서 말하기 전, 말한 다음 한마디 한미다를 곱씹고 있었다.
' 앗 좀 전에 내가 한 말로 00 엄마 기분이 상했으면 어쩌지?' '잘난 체했다고 생각하려나?' '우리 애 학원 레벨은 말하지 말걸 그랬나? 그런데 물어보는데 어떻게 말 안 해? 아니!! 말하면 잘난 체한다 하고 말 안 하면 의뭉스럽다 하면 나보고 어쩌라고?" 머릿속에서 공격형 자아와 수비형 자아가 싸우곤 했다.
민감은 해도 눈치는 덜 보는 타입인데 이렇게 눈치를 살피며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그즈음 이미 인간관계에 회의적인 편이어서 " 싫으면 관두든가 '라는 무기를 어느 정도 장착했을 때인데 이 경우는 달랐다. 나라는 사람 앞에 아이가 서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는 상처 받기 쉬운 초등 1학년생이었다.
아주 먼 옛날에 비가 몹시 많이 내리던 때가 있었다. 온 세상이 물에 잠기고 민들레도 꼼짝없이 물에 빠져서 목숨을 잃을 지경에 이르렀다. 민들레는 너무 무섭고 걱정이 되었기에 그만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렸다. 물이 턱밑에까지 차오르자 마지막으로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 “하느님 너무 무서워요. 목숨만 살려주세요.” 그때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민들레의 씨앗을 하늘 높이 날려 양지바른 언덕에 사뿐히 내려놓았다. 그 이듬해가 되어 그 자리에는 민들레의 새싹이 돋아나서 새로 자라게 되었다. 민들레는 하느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하며 봄이 오면 밝은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며 웃는다.
민들레의 꽃말은 “감사하는 마음”이다. <출처> 다음 백과사전
민들레는 보다시피 하늘을 향해 꽃잎이 누워있다. 자신의 씨앗을 하늘 높이 날려 준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늘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민들레에겐 하늘이 에수님이고 부처님인 것이다.
이 모습을 보고 있으면 비가 올 때나 눈이 올 때나, 더울 때나 추울 때나 자식 걱정으로 기도를 드리는, 또는 종교가 없더라도 마음으로 소원하는 어머니들의 모습이 생각난다.
아이의 일에 비교적 무관심하던 어머니도 자식이 위기에 처하면 갑자기 전사로 변하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내 아이가 잘못되는 걸 마음 놓고 지켜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믿는다)
멀리 갈 것도 없다. 개인주의자인 나도 저 상황이 되면 그 위급한 상황에서 아이라도 벗어나게 하고 싶었을 것이다. 홀홀 날아가는 씨앗을 보며 정말 감사할 것 같다.
아이 친구 엄마와의 관계, 각자의 소증한 아이를 안고 만나는 학부모 모임은 복잡할 수밖에 없다. 물론 모임에서 만난 학부모들은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나온다. 그러나 카페에 앉은 그 어머니들은 실제로 혼자가 아니다. 각각 자신의 무릎에 (눈에는 안 보이지만) 아이도 앉아있다.
예전에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본 게임이 있다. 출연진을 양 팀으로 나눈다. 출연진 양 팀 모두 가슴에 한껏 부푼 풍선을 달고 있다. 상대방 풍선 터뜨리기 게임을 하는 것이다. 시작! 하는 소리와 함께 양 팀의 출연자가 한 명씩 나와 둘이 몸으로 부딪친다. 피하고 공격하고 달아나고 반복적인 행위가 벌어진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출연진 중 한 명의 가슴에 달린 풍선이 터져버린다. 그 사람은 게임에서 졌다. 탈락이다.
학부모 만남은 이 게임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자신의 가슴에 달린 풍선은 내 아이다. 풍선을 가슴에 매단 순간, 아무리 사회에서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해도 빨간 풍선을 매단 어머니는 자신의 이름 대신 빨간 풍선 엄마가 될 뿐이다. 내가 아닌 내 아이 엄마로서 만나는 것, 학부모 모임의 본질이다.
내 풍선이 (내 아이) 터지지 않을 때까지만 유효한 관계. 아이가 상처 받거나 위태로운 일이 생기면 그 게임(만남)은 대부분 종료된다. 그만큼 조심할 수밖에 없다. 게임을 지속시키려면 내 가슴에 단 풍선뿐만 아니라 상대방 가슴에 단 풍선까지 같이 조심하며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날마다 뛰어놀고 다투기도 하며 크는 초등학생들에겐 조심하란 말이 무색하다.
친구 P의 조언 덕분에 학부모 모임에서 풍선이 터지지 않을 만큼 안전거리를 유지하면서 지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작은 아이 초등학교 2학년에 큰아이가 고등학생이 되면서 주말 나들이에 한계가 왔다. 큰아이 학원 데려다주고 저녁 식사시간 안에 갔다 올 수 있는 곳이라곤 기껏해야 동네 꽃시장이나 과학관, 박물관, 미술관 정도인데 이미 그곳들은 내부 안내도를 그릴 수 있을 정도로 방문이 잦았던지라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다. 조용한 큰아이와 달리 활동적인 작은 아이는 뛰어놀고 싶어 했고, 그런 아이가 집안에서 방바닥을 긁고 있는 걸 보고 있자면 내가 답답해 안될 지경이었다.
고민 끝에 내 일생에 한 번도 없었던 일을 저지르기로 했다. 아이들 농구팀 수업 짜기.
팀을 만들려면 아이 친구 어머니들께 전화해 승낙을 받아야 했다. 관계 유지보다는 관계 맺기에 좀 더 수동적인 나로서는 생각만 해도 머리카락이 곤두설 정도로 벅찬 일이었다. 한평생 먼저 모임을 주도한 적이 없고 늘 불러주면 불러주는 곳으로 못 이기는 척 찾아 들어갔던 내가, 그 어렵다는 학부모 세계에서 무려 팀 결성을 하게 된 것이다.
다행히 10명으로 예정된 축구팀은 연락하자마자 순조롭게 구성됐다. 팀원들 바람대로 한 달에 한 번 모임도 가졌다. 모임에서는 아이들 이야기도 하고 때론 집안 이야기도 하며 지냈다.
그렇게 2년쯤 지났을까.
하루는 모임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는데 여느 때와 달리 피곤하지 않았다. 친구 만나고 온 날처럼 마음이 개운했다. 생각해 보니 어느새 내가 조금씩 갑옷을 벗고 있었나 보다. 가뿐했다.
그 후로도 몇년 간 팀은 지속되다가 해체했지만, 그 학부모들은 가끔 만나 사람 사는 이야기를 한다. 여전히 풍선을 앞에 차고 너무 가까이 닿지 않을 정도의 거리는 유지한 채, 속도도 조절해가면서 말이다. 만나면 편안하고, 안 좋은 일 있다면 서로 걱정하면서 학부모로서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해 보니 그 어렵다는 고난도 문제의 실마리를 찾은 느낌이다.
삶의 고난도 문제라면 지레 겁먹고 포기하던 나만의 약점을 극복하고, 지시문 단어 하나하나 조심하며 읽어 내려가 보니 조금씩 문제를 풀 수 있었다.
아직 아이들은 대입이라는 큰 관문을 남겼지만 그 관문을 다 같이 잘 넘거나, 그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언젠가 우리들은 풍선을 날려 보낸 채, 00 어머니란 이름을 떼고 00 씨로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희망을 가져본다.
학창 시절이 생각난다. 쉽다고 자만하며 풀었던 문제는 어이없이 틀리고, 어려운 문제는 신중하게 읽어 내려가 풀어냈던 기억. 그런 일은 관계에서도 일어나나 보다.
<사진출처: 픽사베이>
이 글은 21. 3월에 출간된 책 <바람에 흔들리게 창문을 열어주세요> 에 일부 수정돼 실려있습니다.
<바람에 흔들리게 창문을 열어주세요> 출간 이야기 (brunch.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