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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도 Sep 16. 2020

이런 마음으로 글을 쓰려고 합니다

대나무와 바람, 독자와 저자

'식물에 비춰 본 인간관계'란 주제로 매거진을 쓰고 있다.

매거진을 기획할 때, 대략 6개의 테마를 정해놓고 시작했다.

그 6개의 주제글을 다 써서 발행한 것은 지난주,

어제부터 글감을 찾기 시작했다. '아 뭘 쓰지?' 집안 베란다에 있는 식물을 쳐다본다.

갑자기 무색무취 무개성의 식물들을 원망도 해본다.(미안)

애초에 식물 자체가 좋아서 집에 들여놓고,  이제는 글감의 '도구'로 전락시켜 버린 것 같아 미안하다.


그러다가 문득,

'도대체 내가 왜 이렇게 브런치에 글을 열심히 쓰려고 하지?'라는 생각에 닿았다.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마감 날짜가 있는 것도 아니다. (막상 내일까지 마감인 글은 아직 퇴고가 안 끝났다)

언젠가부터  자동차가 언덕을 내려갈 때 엑셀을 안 밞아도 되듯, 그렇게 누가 떠밀지 않아도 열심히 글을 쓰고 있었다.


그 욕구는 내 글을 이리저리 재보게 했다.

이미 발행한 글을 다시 볼 때면 그 분석의 칼날은 더 날카로워졌다.

'재미가 없어. 재미가.... '

'차라리 솔직하게라도 써. 타인의 글 읽는 이유가 뭐야? 사람 사는 모습이 다 제각각이니 그중 하나를 보고 싶은 거 아냐. 넌 그중에 하나로 네 모습을 드러내면 되는 거야. 그뿐이야. 네 역할을 잘못 해석한 거 아닐까?'

그렇다. 브런치에 와서 다른 작가님 글을 읽으면서 느낀 점이다.( 철학이나, 시, 기사류의 이야기는 제외한다)

대부분 자신의 일상을 스스럼없이 보여주고, 자신의 아픔을 고스란히 내보이며 살갗을 드러낸다. 

햇볕에 그을린 피부처럼 건강해 보인다. 보이는 살갗에서 온기를 느끼고 드러난 상처에서 같이 아픔을 느끼며 위로와 공감을 나눈다.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글은 깊게 파고든다. 감동적이다.





북적이는 해변가.

다들 시원한 수영복 차림으로 누워 선탠을 하고 있는 자유로운 느낌,

나 혼자 유행 지난 정장 차림으로  양산을 쓰고 힐을 신고 걸어 다니는 것 같았다.

힐은 모래사장에서 푹푹 빠지기 일쑤라 걸음걸이는 우스꽝스러워진 지 오래다.

폭 좁은 펜슬 스커트는 보폭을 줄여 갑갑하다.


주위를 둘러보고 눈치껏 힐을 벗고 양산을 접었지만

재킷을 벗기는 힘들었다.

'살짝 벗어봐. 드라마에서 첫회에 남자 주인공이 왜 자주 샤워하는지 몰라? 어느 정도 벗어줘야 하는 거야."

자꾸 귓가에 맴돌았다.


때마침  휴대전화 화면 속 브런치에 뜨는 "나만을 위한 PICK"

"당신의 구독자가 늘지 않는 이유"

?????'약 올리나?'

나이 들면서 줄어든 머리숱, 거기에서 머리카락이 빠지듯이 밤새 두 분의 구독자가 구독해지한 다음날이었다. 내가 뭘 잘못 썼나? 의기소침한 와중 저 PICK을 받았다. 아 내 머리카락.....(만큼이나 소중한 구독자).

사실 자유로운 글쓰기를 위해서, 가족, 친구한테조차도 말하지 않고 브런치를 시작했다. 그래서  단 한 분의 구독자를 모시기까지 아주 오~~ 랜 시간이 걸린 나로서는 지금의 구독자 수도 감지덕지한 게 사실이다. (사실 이것도 몇 번 어딘가에 글이 올라간 덕이다 어딘지는 모르는데 조회수 급증을 몇 번이나 경험했다) 그럼에도 더 많은 이들이 내 글을 읽고 공감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진심이다.(그러니까 네가 잘 써야지!)

가수는 유행가 가사처럼 된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가까워지고 싶지 않은 사람>이란 글을 발행한 이후로, 내가 가까워지고 싶지 않은 사람이 되었나? 싶을 때도 있었다. (실제로 그 글은 어딘가에 올라갔던 것 같은데 조회수가 1000씩 늘어날 때마다 조회수 알림이 왔을 뿐이었다. 지금 그 글을 봐도 공감보다 비난을 받을만하다) 


청승은 무의미하다.

결심을 하고 내 마음속 탐구를 시작한다.

스쿠버다이빙 장비를 하고 내 마음 바닷속으로 들어간다. 바다 깊은 곳, 내 마음 끝에 닿아야  바닷 바닥, 심연 해초를 볼 수 있는데 중간쯤 내려가면 숨이 턱 막힌다. 헉헉 거리며 중간에 올라온다.

'왜 그럴까?'



아침 일찍 내린 홍차를 마시다 한두 방울 흘린 날, 내가 흘린 홍차는  옅은 브라운색인데  분홍색 실내복에 묻은 홍차는 진한 브라운색으로 변한 걸 보고 알게 됐다.

소통의 실패.

친구한테 털어놨던 내 마음속 깊은 이야기가

친구의 판단 필터를 거쳐 왜곡돼 있던 것을 확인한 순간들.


그 헛된 시간,

그 허망하게 흩어진 진심.

그런 것들이 나를 해변가에서도 재킷을 걸치고 거닐게 했다.

친구한테도 털어놓지 못하는 폐쇄적인 내 마음을 공개된 공간에 다수에게 털어놓기란 애초에 힘들 수밖에 없었다. 지난날 소통의 실패, 소통의 배신이 하나 둘 떠올랐다.




작은 아이가 초등학생 때, 고등학생이던 큰아이를 학원에 데려다주고 남편과 나, 아이는 집 근처 꽃시장에 갔다가 집에 돌아오곤 했다. 평소 꽃이나 식물에 관심이 전혀 없는 남편에겐 그 시간이 인내의 시간이었으리라. (사실 열 번 중 한두 번 정도 갔던 것 같다)

꽃시장 안을 심드렁하게 뒷짐 지고 따라오던 남편이 어느 날 멈춰 섰다.   

우리 집 거실 한구석에 있는 대나무^^

"이건 내가 살 거야"하고 집어 든 식물이 있었다.

어린 대나무.  뿌리도 없고 잎사귀도 없이 몸통만 앙상하게 30센티미터 자처럼 생긴 대나무를 들고 왔다.

" 이건 일식집 입구에서 인테리어로 쓰는 거 아냐? 그게 맘에 들어?" 

남편하고 말만 하면 딴지를 걸던 그 당시 내가 또 한마디 쏘았다. 

"응. 이거 살 거야."

 못마땅하지만 할 수 없이 아이가 집어 든 식물과 같이 계산했다.

그 이후, 그 대나무 가꾸기는 남편 몫이었다.

아주 이따금씩 물을 주고, 이따금씩  잎을 따주면서 자라고 있다.

7년 전 30센티미터였던 대나무는 지금 내 키보다 더 크게 자랐다.

거실과 베란다 사이 귀퉁이에서  무럭무럭 자라났다.




대나무의 성장력은 마디에 있다고 한다.

끝날 듯, 매듭짓고 다시 이어지는 마디.

이쯤에서 더 이상 안 자라나? 싶을 만하면 마디로 숨을 고르면서 한번 더 치고 올라간다.

높이 솟아오르는 성장력은 마디가 없었다면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대나무를 보며 글쓰기를 시작한 이후의 내 모습을 떠올린다.

'아 역시 난 안돼 '하고  내려놓으려고 했던 수많은 순간들,

내 글 앞에서 한없이 초라해졌던 괴로운 자기 검열 시간들,

그런 시간들이 대나무의 마디마디가 아니었을까?


대나무 속은 텅 비어있다.

속이 텅 비어있기 때문에 자신의 무게를 이길 필요가 없다.


대나무 속처럼 마음을 비우는 것,

이 또한 글쓰기에 필요했다.


되돌아보면

글쓰기가 안될 때는 너무 잘 쓰려고 했을 때다.

욕심을 내려놓고 그냥 쓰는 것.

쓰다 보면 잘 쓰는 날도 있고 그냥 그런 날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대나무처럼 속, 마음을 비워본다.


또한 대나무는  바람이 불면 버티지 않고 바람의 방향으로 흔들린다.

흔들리기 때문에 바람에 꺾이지 않는다.

속을 꽉 채우고 자신의 무게로 바람을 맞서 버텼다면

대나무는 부러졌을 것이다.


독자가  내 생각대로 내 글을 읽어주기 바라기 보다.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처럼,

독자의 판단에 따라 흔들릴지언정,

꺾이지는 않는 그런 날이 오기를 바란다.


지금은 독자의 마음을 미리 예측하며 글감을 고르고 지우지만,

언젠가는 독자의 해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날이 오겠지


소통 실패로 마음의 문을 닫았던 나도

언젠가는 서서히 문을 열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너무나 좋아하는 캐럴 드웩 ( Carol Dweck) 교수의 TED  < 자신이 발전할 수 있다는 믿음의 힘>. 

(브런치에서만 두 번째 인용해, 자가 복제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 부끄럽지만 부끄러움을 감수하고 또 인용한다)


미국에 있는 시카고 고등학교에서는 낙제를 받은 학생에게

"Fail"이란 성적표를 주지 않고 "Not yet" 이란 성적표를 준다고 한다.

사고의 전환이다.

끝을 어느 시점으로 정하느냐에 따라 '실패'가 '아직'은 아닌 것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앞으로 글을 쓰면서 실망하는 순간도, 좌절하는 순간도 닥치게 될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난 대나무를 떠올리려고 한다.

지금 대나무의 마디를 지나고 있다고. Fail이 아니라 Not yet인 마디일 뿐이라고.


대나무의 마디를 끝으로 인식했다면 대나무의 성장을 만끽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마디를 거쳐 더 성장해 나가는 대나무처럼

실망, 좌절을 지나고 나면 아마 조금씩은 자라 있을 것이다.


마음을 비우고 한 문장씩,

포기하지 않는 한.


                                                                                            <사진 출처:픽사 베이>

이 글은 21. 3월에 출간된 책  <바람에 흔들리게 창문을 열어주세요> 에 담지 않았습니다.


<바람에 흔들리게 창문을 열어주세요> 출간 이야기 (brunc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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