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가 지나간 자리에는 무지개가 남는다.
약속장소에 서서 하영을 기다린다.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나고. 야속한 시곗바늘은 숫자들을 지나쳐 예비종이 칠 시간을 가리킨다. 심장이 쿵, 내려앉은 것도 잠시, 눈에 뜨거운 물이 차오른다. 안 왔어.
고백한다고 하면 궁금해서라도 나오지 않나? 내가 고백하려던 걸 안 걸까. 착하고 상냥하면서도 자기 생각은 뚜렷하게 말하던 하영이가, 약속장소로 나오지 않을 정도로 내가 싫었던 걸까? 지금까지 놀면서 쌓아왔던 순간들이 스쳐 지나가며 불쑥 화가 났다.
거절당할 수도 있다는 것 정도는 이미 각오했지만, 이렇게 나오지 않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당연히 각오도 안 했고. 눈앞을 흐리게 하는 뜨거운 눈물을 소매 아래로 드러난 맨 팔로 거칠게 문질러 닦아내고, 스마트폰을 꺼내 메시지를 켠다.
‘너 어디….’,
됐다. 삭제 버튼을 꾹 눌러 글자들을 전부 지운다. 편지를 못 봤을 수도 있잖아. 자기 합리화를 하며 그 자리에 서 눈물을 가라앉히고 교실로 돌아간다. 시곗바늘은 이미 수업시간을 한참 넘어있었다.
“박성찬! 너 왜 이제 들어와?”
“죄송합니다.”
허리를 꾸벅 숙여 선생님께 인사하고는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하영이 내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자리에 앉으니, 창가에서 비치는 햇살이 내 의자를 뜨겁게 달궈놨다. 평소라면 기분 좋았을 이 온기가, 오늘따라 불쾌했다.
“되는 거 진짜 없네.”
작게 중얼거리고는 책상에 엎드린다. 하영의 조금은 짜증이 난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심장이 저릿하다. 역시 편지를 봤구나. 내가 싫어서 안 나온 거였구나.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생각들에 다시 눈물이 차오르자, 눈을 꾹 감는다. 그냥 잠이나 자자.
학교 끝나는 종이 울리자마자 교실을 박차고 나왔다. 조심히 가라던 선생님의 말을 전부 끝나기도 전에, 마치 호랑이에게 쫓겨 도망가는 사슴처럼. 하영은 호랑이와는 거리가 멀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맑은 눈망울이 꼭 사슴 같았다. 그러나 오늘은 꼭 호랑이 같았다. 하영의 앞에서 나는 천적에게 쫓기는 사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조금은 부은 눈으로 건물 밖을 나서려 할 때, 고개를 드니 굵은 빗방울이 다시 쏟아지고 있었다. 아까 점심시간에는 내리지 않았던 것 같은데. 다시 가방을 뒤적여도 비에서 나를 보호할 수 있는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아침에도 없었는데 지금이라고 있을까. 신경질적으로 가방을 거칠게 닫고 앞으로 맨 후 벽에 기댔다.
하교에 들뜬 학생들의 웃음소리와, 거친 빗줄기가 땅과 지붕에 부딪히는 소리를 들으며, 작게 거친 말을 중얼거린다. 그냥 비를 맞으며 가는 방법도 있겠지만, 오늘 비까지 맞았다간 서러워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성찬아, 우산 없어?”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린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으며, 습관적으로 손톱과 손톱을 부딪혔다. 반사적으로 몸을 돌리자 익숙한 여자가 보인다. 이하영, 오늘 가장 만나고 싶지 않았던 사람 1위. 2위는 김윤섭. 분명 옆에서 비아냥거리며 사람의 속을 다 긁어놓을 것이 분명하다.
“응, 없어....”
목소리가 기어들어간다. 나 지금 엄청 찌질하고 멋없는데. 얼굴이 다시 붉어지는 느낌에 고개를 확 숙였다. 검은 머리카락이 내 시야를 가린다.
“나는 있어. 같이 쓰고 가자.”
같이 쓰자고? 오늘 고백 편지는 무시했으면서? 아까 나를 외면했으면서? 누굴 놀리나. 울컥, 서러움과 짜증이 올라 고개를 쳐들어도 바보 같은 마음은 하영의 얼굴을 보자마자 살살 녹아버린다. 같이 우산 쓰고 가고 싶어. 얘기도 하고 싶고.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하영은 오늘 잠수로 고백을 거절한 사람이 아닌 것처럼 웃으며, 우산을 펴고 빗속에 먼저 발을 내딛는다.
“가자!”
같이 나란히 걷다 보면 고백하려 기다리던 순간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왜 안 나왔을까, 혹시 못 나온 게 아닐까? 아까 나는 왜 외면했지? 왜 처음 보는 표정으로 나를 쏘아보다, 고개를 돌린 걸까?' 복잡한 생각들에 조용히 걷다 입을 연다.
“하영아.”
“있잖아.”
내 목소리와 하영의 목소리가 겹친다. 가만히 눈을 굴리며 하영의 시선을 피하자, 하영이 끈질기게 시선을 쫓아온다. 사슴 같은 눈망울의 호랑이 같은 시선에, 졌다는 듯 말했다.
“너 먼저 말해.”
“오늘 내가 고백 편지를 받았어. 글씨체가 익숙하던데, 혹시 네가 쓴 거야?”
역시 봤었구나. 역시 상냥한 하영이 그냥 무시할 리가 없지. 말로 거절하려고 했던 거구나. 눈시울이 붉어지고, 목이 막힌다. 뜨거운 눈물이 차오른다. 그런 모습을 하영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 고개를 푹 숙인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하영은 조금도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듯 바로 말을 이어간다.
“약속 장소 왜 안 나왔어?”
“뭐라고?”
놀란 내 발걸음이 멈추니 다급하게 하영의 발걸음도 멈췄다. 우산을 살짝 뒤로 젖혀 내가 비에 젖지 않도록 막아준다.
“강당에서 만나자며. 우리 처음 본 곳이 거기잖아.”
“... 웬 강당? 우리... 음악실에서 처음 만났잖아. 정확히는 교실이지만, 우리가 마주친 곳은 음악실이 처음,”
“이 바보야.”
내 말을 하영이 뚝 끊어버린다. 아까 나를 외면하던 표정이 그대로 드러난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내 옆으로 오고는 머리카락을 베베 꼰다.
“우리 입학식에서 처음 만났잖아. 네가 내 지갑 주워주면서.”
기억, 났다. 갈색의 짧은 머리였던 것 같은데 이만큼 머리가 길었구나. 처음 만났을 때도 머리가 그렇게 길진 않았던 것 같기도 하고... 머리를 뒤로 넘기며 몸을 돌린다.
“난 너 입학식 때부터 좋아했어.”
“... 뭐?"
“다들 지갑 밟고 그냥 지나갈 때, 네가 툭툭 털어서 돌려주는 거보고 상냥하다 싶었거든. 강당에서 연설하는 것도 인상 깊었고.... 그럼 뭐 해, 입학식은 기억도 못하는데.”
“어, 그, 그건.... 미안해.”
피식, 입꼬리를 올려 가볍게 바람 새듯 웃고는 하영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어느새 비가 그쳐 파란 하늘을 보인다. 우산을 접고는 먼저 발걸음을 뗀다.
“아, 엄청 화나는데 누가 떡볶이 사주면 풀릴 것 같네~”
“사, 사줄게, 순대랑 튀김도 사줄게!”
찰방, 급하게 내가 디딘 웅덩이에 물이 튄다. 그곳을 보면, 작은 무지개가 떠있다. 그 위로 하영이 뒤 돌며 환하게 웃는 모습이 무지개와 겹친다. 소나기가 지나간 자리에, 아름다운 무지개가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