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가 지나간 자리에는 무지개가 뜬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건지. 거세게 쏟아지는 빗줄기에 인상을 찌푸린다. 혹시나 싶어서 예보를 두 번이나 확인했는데, 분명 비 예보는 없었다. 그러니까, 오늘 아침까지는. 옷과 머리가 홀딱 젖을 것을 생각하니 짜증이 치밀어올라 거칠게 혀를 차낸다.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서 창문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쉰다. 집으로 돌아가 우산을 가지고 오기에는 30분이나 이 사람이 가득한 버스 안을 버텼다. 등교시간까지 15분밖에 남지 않았다. 이 버스를 그대로 타고 가도 지각을 할 상황이다. 어차피 늦는 김에 옷과 머리가 젖지 않게 우산을 가져오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여기서 더 지각을 할 수는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우산 대신 쓸 수 있는 것을 찾으려 가방 안을 뒤적거려 보지만 낡은 공책 하나도 가방에 없다. 공부도 안 하는데 공책이 있을 리가 없지.
오늘은 되는 게 없는 하루였다, 정말로 단 한 개도. 항상 울리던 알람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울리지 않고, 양말의 짝은 어디로 갔는지 서랍을 아무리 뒤적거려도 비슷한 하얀색만 가득했다. 신발끈은 계속 풀려 밟고 넘어져 옷은 더러워졌고, 엘리베이터는 왜 맨 꼭대기 층에서 내려오지 않는 건지. 버스는 또 왜 늦는 건지.
대단한 운은 바란 적도 없지만, 이런 불운들이 겹치는 건 좀 너무하지 않나? 결국 시계는 등교 시간인 8시 30분을 넘어 35분을 가리켰다.
“네가 어쩐 일로 지각을 다 하냐? 이번 회식 때는 네 돈도 있겠네. 많이 먹어라~”
이놈의 이름은 김윤섭. 하루라도 입을 다물고 점잖게 있으면 목에 가시라도 돋는 건지, 장난을 칠 구실이 보인다면 제일 먼저 달려오는 놈이다. 친구라는 놈이 안 하던 지각을 했으면 어디 아픈 건지 빈말로라도 걱정의 말을 내뱉어야 하는 게 아닌가?
입꼬리를 올리며 장난스레 키득거리는 꼴을 보니 짜증이 치밀어 그놈의 갈색 머리칼을 휘어잡고 치우듯 밀어버린다.
“다물어.”
물이 튄 검은 뿔테안경을 벗어 무심히 하복 셔츠로 문지른다. 말끔히 닦인 안경을 쓰고서야 또렷해진 시야로 그녀를 찾았다. 그래, 액뗌했다고 치자. 오늘은 아주 중요한 날이니까.
검은색 긴 생머리, 긴 속눈썹, 부드러운 눈, 분홍빛 입술, 새하얀 피부, 큰 키에 마른 몸. 누구나 한 번쯤 마음에 품었을 만인의 첫사랑 상. 오늘은 1년하고도 3개월을 짝사랑한 이하영에게 고백하는 날이다.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조별 과제를 하던 날이었다. 정확히는 반이 바뀌면서 처음 만났지만, 내 눈에 그녀가 들어온 것은 학기 초, 음악 선생님이 내주신 ‘뮤지컬을 보고 감상문 써오기’라는 조별 과제 시간이었다. 부드러우면서도 귀에 또렷하게 꽂히는 목소리로 무슨 뮤지컬을 볼 건지, 어디로 갈 건지, 누가 예매할 건지, 조별 과제의 리더를 맡아 회의를 이끌어가던 하영이는 완벽한 내 이상형이었다.
하영을 바라보다 보니 심장이 두근두근 뛰며 얼굴이 잔뜩 붉어졌다. 그것도, 모두가 보는 앞에서. 열이 나는 게 아니냐며 하영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땐 정말이지 내 몸에 이상이 있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온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때문에 괜스레 나는 그녀의 손을 살며시 뿌리치며 상황을 모면해야만 했다.
"괜찮아. 좀 더워서 그런가 봐."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얼굴에 열을 식히려 노력했다. 지금 내 얼굴을 볼 수 있었다면 엄청 우스운 꼴일 게 분명했다.
그 이후로 조별 과제 핑계로, 시간표 이야기로, 어느새 서로의 개인적인 이야기로 이어져 개인 메시지를 나누는 빈도가 늘었다. 줄게 있다며, 빌릴 게 있다며, 심지어 놀 사람이 없다는 핑게로 둘이 만나기 시작한 것도 벌써 1년하고도 2개월, 그리고 19일째다. 이정도면 하영이도 날 좋아하는 게 아닐까? 우스운 상상으로 남몰래 마음을 키워가다 바로 오늘, 고백하기로 결정했다.
교실 뒤편의 거울에 서서, 어느새 마른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정돈한다. 괜스레 빗질을 해보고, 가르마도 타보고, 왁스를 바르는 건 교칙상 안 되니까 넘어간다. 그래도 부스스한 꼴을 보여줄 순 없으니까. 넥타이를 풀었다 다시 매보다가, 아차 싶은 마음에 주머니에 꽂아둔 편지의 상태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다행히도 빗물에 젖지 않은 모양이다. 이 편지를 3개월동안 썼다는걸 알게되면 하영이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야, 성찬아! 밥 먹으러 가자!”
뒤에서 들리는 윤섭의 목소리에 뒤를 돈다. 벌써 점심시간인가? 하영이 나가는 모습을 보다 편지를 사물함에 던지듯 넣어둔다. 옆에서 서성거리는 윤섭의 엉덩이를 걷어찬다.
“뛰어! 오늘 밥 빨리 먹어야 해.”
엉덩이를 걷어차이자 내게 복수하겠다며 달려오는 윤섭을 따돌려 누구보다 빨리 급식실에 들어간다. 앞에 아무도 없는 걸 보니 뭐든 잘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기대감에 웃음이 절로 지어졌다. 차가운 급식판을 들고, 급식 아주머니께 밥을 받는다. 씩씩하게 인사도 잊지 않았다. 밥을 버리기 쉽게 가까운 곳에 자리 잡고는 크게 밥을 떠 입에 밀어넣는다. 3일 굶은 사람처럼 빠른 속도로 밥을 해치웠다.
"배 많이 고팠냐? 뭘 그렇게 급하게 먹어?"
내 행동의 영문을 알리 없던 윤섭은 눈이 휘둥그레지며 내게 물었다. 앉은지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아 깨끗하게 빈 식판을 들고 일어났으니까, 얼마나 빠르게 먹었으면 오늘 내가 뭘 먹었는지 기억도 나질 않았다. 뭐, 그건 아무래도 상관 없겠지. 나는 이제 막 붐비기 시작한 식당을 뒤로하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매번 마주치는 학교 안 가로수들과 보도블럭이 다르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