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쓰는자 May 30. 2020

쌓여있는 수건 속에서 아빠 스킨향이 느껴진거야♬

혼자만의 걸작을 자랑합니다

* 본 매거진은 작가의 다이어리에 적혀 있는 짤막한 글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완성해나가는 여정을 담습니다.

우리집 수건에선
아빠 냄새가 난다

분홍색 수건에서도
하늘색 수건에서도
맡을 수 있다

깜깜한 새벽
수건에 냄새를 남겨두고
아빠는 회사에 갔다

학교에서 돌아와도
아빠는 회사에 있다

아빠는 회사에 있지만
수건에도 있다

우리집 수건에선
우리 아빠 냄새가 난다


초등학교 1학년, 생에 첫 백일장에 제출했던 '아빠 냄새'라는 시입니다.

엄마가 모아둔 제 어린시절의 추억상자를 여행할 때면 꼭 찾아보는 것 중에 하나죠.

8칸 공책에 삐뚤빼뚤 눌러 쓴 '혼자만의 걸작'입니다.

시를 읽다보면 제가 쓴 글이 맞는지 의심스럽습니다. 똘똘한 꼬맹이가 쓴 꽤 재미난 시라는 느낌에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게 되고, 괜히 그 꼬맹이가 기특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리곤 다시 생각합니다. '이건 내 작품이야'. 뿌듯한 마음으로 천천히 다시 시를 곱씹죠.


저 시를 쓴 꼬마아이는 자신의 아빠를 참 사랑했나 봅니다. 그 아이의 삶 속에서 아빠라는 존재는 세상을 바라보는 절대적인 기준이었을 겁니다. 세상에서 가장 크고, 가장 멋있고, 가장 똑똑하고, 가장 힘쎈 사람은 무조건 우리 아빠였으니까요.

어린시절 낡은 추억을 들여다 보면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습니다. 저 시와 연관된 추억에는 오순도순 모여 수박을 먹고 있는 모습이 딸려오네요. 하지만 가족들 사이에서 아빠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아마도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일하고 있을 시간이겠죠. 그 때의 꼬마아이는 가족들 속에서 잠시 비어있는 아빠의 빈자리를 수건에 남아있는 냄새로나마 채우고 싶었나 봅니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어린시절 아빠 없이 지낸 불쌍한 아이가 된 기분이 드네요. 하지만 그건 절대 아닙니다.


매주 주말이면 온 가족이 빠짐없이 가족 나들이를 나갔습니다. 산과 강, 바다, 유적지나 박물관 등 배움을 얻을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갔습니다. 자가용이 없어 아빠 등에 메달려 있는 배낭에 한 가득 짐을 싣고 다녔습니다. 그 시절 아빠는 세상에서 가장 힘쎈 사람이였으니까요. 뽀송뽀송한 뇌를 갖고 있던 어린시절의 저는 그 덕에 건강하고 생생한 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저희 부모님은 학원 책상에 앉아 수학 문제를 푸는 것 보다 직접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살아있는 교육이 더 중요하다 생각했습니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대신 해결해 주는 것보다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 여겼습니다. 자식을 당신과 똑같은 인격으로 대하며 제가 가진 권리를 마땅히 누릴 수 있게 배려해 주었고, 그에 따르는 책임은 스스로 질 수 있도록 키웠습니다. 저는 그렇게 제 인생 하나쯤은 책임질 줄 아는 건강한 어른이 되었습니다. 요즘에도 아빠와 소주 한잔 하며 종종 얘기합니다.

"난 건강한 교육을 받으며 컸어. 그래서 무탈하게 잘 자란 것 같아.

나는 꽤 좋은 자식이고, 엄마 아빠는 참 좋은 부모야. 덕분에 난 지금 훌륭한 어른이 되었어."


아빠가 끌어주는 길을 따라 걷다보니 어른이 되었습니다.

훌륭한 보호자 아래에서 안전하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는 사실이 너무 감사합니다.

하지만 몇 년 전, 엄마와 아빠가 나란히 수술실로 들어가던 순간부터 관계는 역전되었습니다.

'더 이상 그들이 나의 보호자가 아니구나. 내가 그들의 보호자가 되었구나.'

그토록 커 보이던 아빠의 뒷모습이 쓸쓸해졌습니다. 한없이 작고 여린, 그래서 보호가 필요한 대상이 되었습니다.

모르는 게 없던 엄마는 세상의 변화 속에서 조금씩 뒤쳐지기 시작했습니다. 모르는게 하나 둘 늘어가는 엄마는 저에게 하는 질문이 늘었습니다.

이제는 제가 부모님에게 스마트폰의 사용 방법을 가르쳐 주고, 해외여행을 함께 가고, 새로운 음식이 있으면 소개해줍니다. 변해가는 세상속에서 그들이 뒤쳐지지 않도록 밀고, 당기며 오늘을 보내죠.

어린시절 나에게 새로운 세상을 소개시켜줬던 그들처럼, 이젠 제가 그들에게 변해가는 세상을 소개해 줄 차례가 왔네요.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보면, 어린시절 우리 집 수건에서는 정말 아빠 냄새가 났습니다. 정확히는 아빠가 쓰던 '남자 어른'의 스킨 냄새였던 것 같네요. 매일 아침 눈을 뜨고, 세수를 하고, 수건에 얼굴을 묻고, 아빠의 냄새를 맡았습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아빠와 늘 함께하기에 든든했던 시간들이였죠.


지금은 수건에서 나는 아빠 냄새를 맡지 못하는 어른이 되어 버렸습니다. 요즘 우리집 수건에선 제가 좋아하는 섬유유연제 향이 납니다. 어쩌면 부모님이 그 수건 속에서 자식의 냄새를 맡을까요?

이제 저는 앞에 놓인 시간들을 늙어버린 부모님의 뒤를 지켜주는 든든한 자식으로써 살아갈 예정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구름이 글썽이면 이별이 오네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