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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자 May 17. 2020

구름이 글썽이면 이별이 오네요

이별에 대처하는 자세

* 본 매거진은 작가의 다이어리에 적혀 있는 짤막한 글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완성해나가는 여정을 담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언젠가는 끝난다.
다만 그 관계가 지속되는 동안에는 최선을 다 하자.
끝이 지나가고 난 후 남아있는 마음의 찌꺼기가 없어야 한다.
깨끗하게, 맑게, 자신 있게.
마지막 인사는 쿨하게 하고 돌아서자.
시간이 지나고 한 번씩 찾아오는 기억은 미련이 아닌 추억이 될 수 있도록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진심을 다하자.


이별을 생각해봅니다.

제 기억에 새겨진 첫 번째 이별은 10살, 초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창밖으로는 한 여름의 소나기가 시원하게 쏟아지고 있었고, 저는 오랜만에 학교 갈 생각에 들뜬 마음으로 가방을 챙기고 있었죠.

'따르릉-'

전화벨 소리가 울리고, 곧이어 수화기에 답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습니다.

"뭐? 돌아가셨다고?!"

엄마의 말을 이해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한참을 멍하게 서 있었습니다. 죽음이라는 걸 처음 알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멀리 강원도 산골에 계셔서 1년에 한두 번 만나는 게 전부였습니다. 물리적으로, 심리적으로 거리감이 있던 존재였지만 내 주위의 누군가와 영원한 이별을 한다는 사실이 어린 저에게 큰 충격을 안겨줬습니다.


할아버지의 장례가 끝나고 홀로 남은 할머니가 강원도에서 인천으로 이사 가던 날, 저는 혼자서 마을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 온갖 것들과 작별 인사를 나눴습니다. 제 딴에는 소중하게 여기던 물건들을 선물하며 혼자만의 이별 장면을 연출했습니다.

버스 정류소 옆 코스모스 아래에 스티커를 묻으며 안녕.

여름엔 수영을, 겨울엔 스케이트 타던 강물 위로 뽑기 반지를 흘려보내며 안녕.

할머니 집에 가는 길, 항상 제일 먼저 반겨주던 소에게는 마지막 여물을 먹여주며 안녕.

그 해 겨울이 끝날 때까지 종종 강원도 할머니 댁에 가는 꿈을 꾸었습니다.


바로 다음 해에는 제 인생에서 가장 슬픈 이별을 겪었습니다.

같은 반 친구이자, 수영 메이트였던 '혜원'이라는 친구가 제주도로 전학을 가게 되었죠. 요즘처럼 인터넷이나 휴대전화 같은 것들이 없던 시절이라 다른 지역으로 전학을 가면 연락 닿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바다 건너 제주도였으니 더욱 멀게만 느껴졌죠. 혜원이란 친구는 워낙 성격도 좋고, 얼굴도 예뻐 인기가 정말 많았습니다. 저 역시 그 친구를 아주 많이 좋아했습니다.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게 서툴러 괜히 말도 안 되는 규칙을 들이밀며 '매일 한 번씩 업어달라'라고 억지도 부렸습니다. 그래도 그저 웃으며 매일 업어주던 친구였죠. 편견 없는 마음으로 본다면 일종의 '첫사랑'일 수도 있겠네요. (아, 첫사랑은 엄마였을 테니 두 번째 사랑이라고 해야겠네요)

혜원이가 전학 가던 날은 교실 창문을 통해 우중충한 구름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강단에 서서 마지막 인사를 하던 그 친구의 모습이 구름 위로 겹쳤습니다.

"다들 잘 지내고, TV는 사랑을 싣고에 출연하게 되면 찾아서 다시 만나자."

어쩌면, 아니 절대로 다시는 못 만날 것이라는 생각에 많은 아이들이 울었습니다. 창 밖에서 글썽이고 있던 하늘도 함께 울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끝가지 울지 않고 꾹 참았습니다.

마지막까지 웃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 빨리 가라며 괜히 속에 없는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몰래 편지 한 통을 혜원이의 가방 안에 넣어두었습니다. 그날 밤 잠자리에 누워 엄청 울었습니다. 한 달을 넘게 밤마다 이별의 후유증을 앓았던 것 같습니다. 괜스레 괴롭히고, 장난치고, 못되게 굴었던 모든 순간이 후회되고 미안한 마음에 가슴 한편이 먹먹했습니다. 꽤나 감상적이었던 꼬맹이는 '친구'와 관련된 동요곡들을 피아노 연주하며 슬픔을 달래기도 했습니다. 두어 달이 지난 후 답장을 받았습니다.

숨겨 놓았던 편지 잘 받았다고, 직접 건네주지 왜 숨겨 뒀냐고, 하마터면 소중한 편지 발견 못할 뻔했다고, 그리고 편지 써줘서 너무 고맙다고.

겨우 진정되었던 마음이 답장을 받고선 다시 아렸습니다. 함께했던 시간에 잘못한 게 너무 많아서 아주 긴 이별을 앓아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두 번의 이별을 겪고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생각보다 마음이 여린 사람이다. 이별을 겪으면 슬픔이 너무 길다.'

그때부터 저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마음에 두꺼운 갑옷을 입기 시작했습니다. 사춘기를 지나며 그 갑옷의 두께는 더욱 두꺼워졌고, 20살의 성인이 되었습니다.

대학생이 되고, 새로운 친구들도 만나고, 연애도 하며 남들처럼 지냈지만 마음이 입고 있는 두꺼운 갑옷 때문에 모든 사람들을 향해 알 수 없는 벽을 쳐두었습니다. 여전히 사람을 만날 땐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연애를 할 때는 달라져야 했죠. 한창 서로에게 빠져 있어야 할 때, 콩깍지가 씌여서 이에 낀 고춧가루마저 예뻐 보여야 하는 시간에도 저는 거리를 쟀습니다.

'더 이상 가까이 오는 건 위험해!'

다가오는 상대를 밀어내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쏟았습니다. 사랑을 해야 할 시간을 상대를 밀어내기 위해 써버렸습니다. 그랬더니 이별을 하고 나서 미련이 남게 되더군요. 연애하는 동안 미처 하지 못했던 수많은 일들이 뒤에 남아 일상을 괴롭혀 왔습니다.


불처럼 타올랐어야 할 저의 20살 연애는 "우리 그만 헤어지자"는 제 말이 뱉어지기 전과 후로 나뉘어 따로 떨어져 있었습니다. 헤어지기 전 상대방의 마음과 헤어진 후 제 마음이 한 곳에서 만날 수 있었더라면 잠깐이라도 찬란했을 텐데 아쉬움이 많이 남았습니다. 손잡고 걷던 떨어진 은행나무 잎 위로 비가 쌓여가는 장면을 보며 저는 메모를 남겼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한 번씩 찾아오는 기억은 미련이 아닌 추억이 될 수 있도록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진심을 다하자.'


얼마 전 비바람이 몰아치던 날, 분위기 좋은 카페에 앉아 오랜만에 편지를 한 통 받았습니다.

오랜만에 받은 편지 치고 썩 기분 좋은 내용은 아니었죠.

다만 편지 뒷장에 함께 보낸 시 한 편에 담긴 진심이 고스란히 느껴져 괜찮았습니다.

시로 받은 편지에 대한 답장은 시를 남기는 글로 대신해야겠습니다. 하지만 이 답장은 절대 전해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20여 년 전 제주에서 날아온 뒤늦은 답장에 마음 아려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대에게 가는 길  / 백무산

그대에게 가는 길은 봄날 꽃길이 아니어도 좋다
그대에게 가는 길은 새하얀 눈길이 아니어도 좋다

여름날 타는 자갈길이어도 좋다
비바람 폭풍 벼랑길이어도 좋다

그대는 하나의 얼굴이 아니다
그대는 그곳에서 그렇게 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일렁이는 바다의 얼굴이다
잔잔한 수면 위 비단길이어도 좋다
고요한 적요의 새벽길이어도 좋다
왁자한 저잣거리 진흙길이어도 좋다
나를 통과하는 길이어도 좋다
나를 지우고 가는 길이어도 좋다
나를 베어버리고 가는 길이어도 좋다

꽃을 들고 가겠다
창검을 들고 가겠다
피 흘리는 무릎 기어서라도 가겠다

모든 길을 열어 두겠다
그대에게 가는 길은 하나를 일 수 없다
길 밖 허공의 길도 마저 열어두겠다

그대는 출렁이는 저 바다의 얼굴이다

   



나는 배웠다 / 샤를 드 푸코

나는 배웠다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나를 사랑하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되는 것뿐임을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선택에 달린 일

나는 배웠다
내가 아무리 마음을 쏟아 다른 사람을 돌보아도
그들은 때로 보답도 반응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신뢰를 쌓는 데는 여러 해가 걸려도 무너지는 것은 한순 간 뿐임을

삶은 무엇을 손에 쥐고 있는가가 아니라
누가 곁에 있는가에 달려 있음을 나는 배웠다
우리의 매력이라는 것은 15분을 넘지 못하고
그다음은 서로를 알아가는 것이 더 중요함을

다른 사람의 최대치에 나를 비교하기보다는
나 자신의 최대치에 나를 비교해야 함을 나는 배웠다
삶은 무슨 사건이 일어나는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일어난 사건에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달린 것임을

또 나는 배웠다
무엇을 아무리 얇게 베어 낸다 해도
거기에는 언제나 양면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내가 원하는 사람이 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사랑의 말을 남겨 놓아야 함을 나는 배웠다
어느 순간이 우리의 마지막 시간이 될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므로

두 사람이 서로 다툰다고 해서
서로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님을 나는 배웠다
그리고 두 사람이 서로 다투지 않는다고 해서
서로 사랑하는 게 아니라는 것도
두 사람이 한 가지 사물을 바라보면서도
보는 것은 완전히 다를 수 있음을

나는 배웠다
나에게도 분노할 권리는 있으나
타인에 대해 몰인정하고 잔인하게 대할 권리는 없음을
내가 바라는 방식대로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다 해서
내 전부를 다해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는 것이 아님을

그리고 나는 배웠다
아무리 내 마음이 아프다 하더라도 이 세상은
내 슬픔 때문에 운행을 중단하지 않는다는 것을
타인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는 것과
내가 믿는 것을 위해 내 입장을 분명히 하는 것
이 두 가지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나는 배웠다
사랑하는 것과 사랑받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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