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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닠끼 Nicky Feb 22. 2023

절반쯤은 천천히

'삶 전체 바라보기' 퀘스트에서의 첫걸음마

거동에 큰 무리 없이 내 의지대로 움직이며 삶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 기간이 (크게 아프지 않은 한) 보통 70년 정도일 것이라 생각하니, 어느새 앞의 절반을 지나 뒤의 절반을 남긴 그 중간 지점에 서있었다.


돌이켜보면 앞의 절반은 정신없이 빠르게 달려 계속해서 위로 올라가는 삶이었다. 어쩔 수 없이 생기는 멈춤이나 뒷걸음질은 나에게는 그저 장애물이었다.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달려 올라가려 했을까.


대학 입학을 위해? 취업을 위해? 더 커다란 역할과 더 높은 연봉을 위해?


지난 시간들을 이렇게 단순한 단어들의 나열로 정의하고 싶지는 않다. 매일의 감정은 조금씩 달랐겠지만, 분명 빠르게 성장하고 싶은 욕구 때문이었을 테니. 특히 배움이나 일의 영역에서 '해냈다'는 성취감을 느끼는 것에 대한 중독. 그것이 나의 동력 중 가장 커다란 것이었다.


잠깐 멈춤의 시간도 있었다.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었을 수도 있던 순간을 운이 좋게 잘 버텨냈다. 어쩌면 그 순간을 온전히 누리며 삶을 향한 나의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을 수도 있을 사건이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기엔 너무 어렸던 나이였다. 다른 사람들과 세상 속에서 달리고 싶다는 욕구(특히 배움과 일의 영역에서)는 이 멈춤의 시간을 급속도로 멈췄다.


Image by Freepik




살아남기 위해 그 누구보다 가장 민첩하게 움직여야 하는 스타트업 세계에 오면서 '일에서의 성취'에 대한 중독감은 극에 달했다. 스타트업 씬에서의 최소 2배는 빨리 가는 시간 덕분에, 6년 같은 3년을 보내고 난 어느 순간. 나의 삶을 구성하는 모든 퀘스트 중에서 '일' 빼고는 나의 능력치와 HP가 거의 0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스타트업 씬을 욕하는 것이 아니다.) 일 말고도 삶에서의 다양한 퀘스트가 있었지만, 그 퀘스트를 통과할 수 있는 힘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일'이라는 퀘스트에서 앞의 절반을 빠르게 달려왔으니,
뒤의 절반은 조금 천천히 가도 되지 않을까?


지금껏 달려온 그 결과가 커다란 부를 이루었다거나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알 정도로 커다란 명예를 얻었다거나 하는 엄청난 것은 아니지만, 나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그저 '일'만은 아닐 테니 말이다. 이는 단순히 일에 있어 열심히 앞으로 달려가는 삶에 대한 포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며, "일보다는 개인 라이프가 더 중요해서요"라는 관점 (정확히는 'MZ세대에 입혀진 고정관념') 역시 더더욱 아니다. 그보다는 30대 중반의 나이에서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아주 조금 넓어진 것이라 칭하고 싶다. '일' 퀘스트에서 빠르게 위로 올라가는 삶만 생각했던 지난날을 떠나, 천천히 주변을 살펴보며 가는 삶에 대한 확장. 누군가는 '이제야 그걸 깨달았냐'며 늦었다고 말하고, 다른 누군가는 '벌써 그럴 나이는 아닌데, 배부른 소리'라며 이르다고도 말하겠지만.


그래서 속도변경, 강약조절, 관점확장과 같은 컨셉에서 새로운 시도들을 해보고 있다.

- 일 외의 다른 퀘스트를 보살피는 시도

- 일 외의 다른 퀘스트에서 내 HP를 끌어올리는 시도

- 일 퀘스트에선 천천히 걸으며 주위를 살펴보는 시도

- 일 퀘스트와 다른 퀘스트를 연결해 보는 시도


지난 절반도 마냥 빠르게만 달리지 못했듯이, 앞으로의 절반도 마냥 천천히만 가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건, 인생 전체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천천히 가는 삶"에 대한 인식이 생겼다는 것.

     



70년 삶에서 뒤의 절반을 남긴 중간 지점에서,

'삶 전체 바라보기' 퀘스트의 첫걸음마를 떼는 순간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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