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선 사제지간이지만 한국사 강의를 들으며 최태성 선생님과 한 약속이 있었고 그 약속을 지켰다. 시험이 끝나면 역사의 쓸모라는 책을 사서 읽기로 한 것이었다. 한국사는 꾸준히 공부하지 않으면 시험 답안지를 내는 순간 빛의 속도로 까먹을 일만 남았으니, 역사의 쓸모를 마음에 새겨서 구체적인 내용은 잊더라도 그 쓸모를 우리 생활에 새겨 넣자는 말씀이셨다.
책은 읽기가 아주 편하다. 큰별샘의 강의를 들은 학생이라면 아마도 종이책을 읽으며 선생님의 음성지원이 되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내용도, 어투도, 마음도 익숙하다. 강의에서 잠깐이라도 언급하셨던 내용도 있고, 처음 알게 된 내용도 있는데 현재를 사는 우리들의 과제의 답을 역사를 돌아보며 찾아보는 과정이 의미 있었다. 현재의 에피소드와 착붙인 역사적 사실들을 알아보며, 한번 사는 세상사 별 것 아니네, 싶다 가도 한 번 사는 인생 기왕이면 제대로 살자, 가 되기도 하고 사람 사는 모습과 마음 예나 지금이나 다 똑같구나, 하다가도 사람 사는 모습과 마음이 이렇게나 발전하였으니 인간은 참 존귀하다 라는 생각도 들었다.
꿈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여야 한다.
가장 인상 깊었던 챕터이다. 아이를 키우고, 아이를 키우며 나도 다시 크고 있다. 아이에게 꿈을 심어 줘야 하는 시기에 그 막중한 임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지금 엄마라는 직책의 나이다. 꿈을 가지기 힘든 세상에서 학생 때부터 꿈에 대한 거창한 포트폴리오를 가져야 그나마 대학을 가고, 취업을 할 수 있다 하는데 그에 성공해도, 혹은 실패해도 우울감과 불안감이 극도로 높아진 세상을 살아야 한다. 이래도, 저래도 힘들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향, 파라다이스는 평범한 사람도 행복한 세상이다. 의지가 있으면 직업을 가질 수 있고, 직업을 가지면 귀천의 색안경이 아니라 노동 그 자체로 인정과 존중을 받으며, 그런 사람 노릇과 사람대접에 후한 세상, 그래서 특출 나지 않아도, 멋지게 성공하지 않아도 행복하게 사는 것이 어렵지 않은 세상 말이다. 너무 밋밋하다 할지도 모르겠다. 혹은 너무 불가능한 이상향을 꿈꾼다 할 수도 있겠다. 그러면 세상이 어떻게 발전하겠냐는 비판도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꼭 무엇이 되지 않더라도 내가 나로, 주어진 내 생을 사는 것이 행복한 세상이라면 꿈은 언제나 동사일수밖에 없지 않을까. (인칭대) 명사로서 내가 행복하다면, 내가 꾸는 꿈은 당연히 내가 무엇을 하는, 내가 어떤 것에서 가치를 찾는 동사가 될 테니 말이다. 나도 어느덧 점점 기성세대로 편입이 되는 어른으로서,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이 세상은 자라나는 아이라면 당연히 동사의 꿈을 꾸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꿈이 생겼다. 그 꿈의 전제는 모든 아이가, 모든 “나”가 그 자체로 존중받고 사랑받는 존재라는 것.
아이는 자라며 무엇이 되고 싶냐는 질문을 수없이 받을 것이다. 책에 쓰여 있듯, 큰별샘처럼 뭐가 되고 싶은지 모르겠다는 말에 실망하는 어른의 표정이 보기 싫어 아무 직업이나 갖고 올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면, 그건 여러모로 바람직하지 않다. 무엇이 되고 싶냐는 말에 대답을 찾기 어려우면 잘 모르겠다고, 커봐야 알겠다고 그러는 그쪽은 나 만한 나이에 무엇이 되고 싶으셨냐고, 그것을 이루셨냐고 솔직히 말할 수 있도록 키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엄마는 너희가 무엇이 되든 상관이 없고 재밌게,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돌잔치에서부터 공개적으로 말해왔으니 최소한 엄마의 눈치는 보지 않아도 된다고 말이다. 애 키우는 엄마이다 보니 역사의 쓸모라는 책을 읽고 육아에서 써먹는다. 예전 같으면 에휴, 예전의 나를 잃었구나 했을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아, 나는 지금 내가 맡은 일을 훌륭히 잘 해내고 있구나 하고 스스로를 칭찬한다.
이 책을 아이를 낳아 키우기 전에 읽었으면 아마 가장 인상 깊었던 챕터는 달라졌을 것이다. 아마 아이를 더 키운 후에 다시 읽으면 또 가장 인상 깊은 챕터로 다른 것을 고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 주말에 단숨에 읽어 내린 이번 이 책에서는 꿈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여야 한다에 꽂혀버렸다. 우리 아이는 동사의 꿈을 꾸도록 그렇게 키워야겠다. 아니 꼭 꿈이 없어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주고 싶다. 그것이 책을 읽고 내가 갖게 된 동사의 꿈이다.
바로 독립운동가 박상진입니다. 1910년에 판사 시험에 합격합니다. 평양 법원으로 발령까지 받았는데 사표를 던집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원하는 직업을 얻었는데 포기한 것이죠. 일제강점기에 판사로 일한다면 누가 죄인으로 끌려올까요? 아마 불량 선인들일 거예요. 일제에 저항하는 사람들이겠지요. 판사가 되면 이런 사람들에게 징역과 사형을 선고해야 하는 거예요. 박상진은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앉을자리는 판사의 자리가 아니라 판사의 맞은편, 바로 피고인석이라고 말이죠. 그의 꿈은 명사가 아니었습니다. 법에 대해 아는 게 없어서 늘 당하고만 사는 평범한 이에게 도움을 주고, 정의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사람이 되려고 판사가 된 것입니다. 명사가 아닌 동사의 꿈이었지요. 그렇기 때문에 판사라는 직업이 중요한 게 아니었습니다. 불꽃같은 인생을 살던 박상진은 그렇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박상진은 떠났지만 의열 투쟁의 맥은 계속 이어져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나 광복을 맞이하는 힘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