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남자 사람 두 명과 함께 살고 있다. (큰 남자 사람도 함께 산다). 작은 남자 사람 두 명은 어린이 티가 제법 나는 일곱 살, 다섯 살인데 나를 웃게도, 울게도, 지치게도, 힘 나게도, 밥맛이 떨어지게도 그럼에도 밥을 하게 만들기도 하는 대단한 존재들이다.
같이 지내다 보면 얘네들이 정말 부러운 점이 많은데 그중 하나가 유연함이다. 신체적인 유연함, 정신적인 유연함 모두 포함이다. 신체적 유연함은 말이 필요 없다. 쑤심, 저림, 담, 결림 이런 단어들과는 거리가 멀다. 아니 관계가 아예 없다. 온갖 희한한 자세를 취하기도 하고, 꽤나 아파 보이게 넘어지기도 하는데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는 것도 (엄마가 시야에 들어오면 앵앵 우는 엄살 빼고) 다 애들이 유연해서 그렇다고 한다. 심지어 하루 종일 뛰어 놀고 차에서 불편하게 앉은 채로 십분 졸면 고속충전 완료되는 체력까지도. 정신적인 유연함도 신비롭다. 바싹 마른 스펀지처럼 지식이며 잡식을 쫙쫙 흡수하는 것, 고집 불통 떼를 부리다가도 어느 순간 작은 꼬임에 홀랑 넘어가는 것. 그중 제일 부러운 것은 울고자 마음먹으면 엉엉 울어 제낄 수 있는 것이다. 모종의 억울함을 우는 척으로 어필하려다 정말 엉엉 서럽게 울어버리는 모습은 혼자 보기 아까울 만큼 귀엽기도 하고, 그렇게 감정을 모두 쏟아 버리고 금세 낄낄 웃으며 노는 모습을 보면, 저렇게 살아야 속병이 안 나지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애들의 가장 큰 특징을 꼽으라면 나는 유연함을 이야기한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 어른 말씀을 잘 듣는 것, 자기들 딴에 뻗을 자리 보고 뻗는, 할머니 집 가면 더 말을 안 듣다가도 엄마랑 따로 가서 얘기 좀 하자 하면 금방 점잖아지는 것 모두 유연함 아닐까.
<어린이라는 세계>를 읽었다. 독서교실 선생님의 아이들에 관한 에피소드, 에세이이다. 망아지 같은 유아기는 벗었고, 아직 운둔의 사춘기를 맞이하기 전의 어린이들의 이야기. 아이 둘을 키우는 엄마이지만, 어린이는언제나 어렵다. 같이 사는 어린이들도 어렵지만 다른 집 어린이는 주 양육자의 손길이 많이 닿는 영역의 사람이기에 내가 함부로 손을 뻗을 수 없어 낯선 어른을 대하는 것보다 더 조심스럽다. 아직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작은 존재이지만, 어엿한 한 사람으로 사는 어린이, 누구보다 유연하고 창의적인 사고를 하지만, 누군가의 절대적 보호 아래 놓여야 하는 기가 막힌 운명의 놓인 사람들. 어느 어른이나 지나온 시기이지만, 모두가 기억하고 있지는 않은 시기를 사는 사람들, 바로 어린이들의 세계를 너무 예쁘게 써낸 글이라 읽는 내내 기분이 좋았다. 책에 나오는 표현인 <남의 집 아이> 들의 이야기이기에 더 예쁘게, 사랑스럽게 느꼈는지는 모른다. “옆집 애” 라 생각하고 화를 누그러뜨리라는 말은 아이를 키우는 동안 자주 들은 말인데, 독서교실 선생님의 글에서도 보니 반가웠다고 할까. 바꾸어 얘기하면 우리 집에 공부하러 오는 (큰아이의 친구 몇 명이 일주일에 두 번씩 영어공부를 하러 온다) 아이들이 내 말을 잘 듣는 이유, 나의 지적을 제 엄마에게 하듯 화로 받아치지 않고 수긍하는 모습도 내가 남의 집 어른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사람 관계에 적당한 거리감이 꼭 필요한 이유가 이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무관심에 스러져가는 이웃들이 많다는 건 경계하고, 조심하고, 지양해야 하지만, 가까운 사이일수록 남의 집, 옆집의 거리를 유지하면 더 편안하다는 말이 이 책에서도 나온다.
"어린이들은 부모님이 가라고도 해 주시고, 싫어도 해야 된다는 마음으로 오기도 하고, 그러면서 늘고 그래요. 그런데 어른 들은 막상 해 보면 생각보다 어렵고 힘들어서 두세 달 하고 그만두시는 경우가 많거든요. 어린이들이 훨씬 유연하기는 해요, 대신에 어른은 음악을 조금 더 알아서 재미있게 배울 수 있어요. 이 곡이 어떤 곡인지, 대강 어떻게 흘러가는지 아니까요. " '그게 바로 문제예요, 선생님. 제 귀는 그걸 아는데 제 손이 그걸 몰라요. 그래서 손보다 귀가 더 괴로워요.'
기타를 배우려고 시도했던 적이 있었다. 학원 강사로 일을 하며 일에, 사람에, 아이들에 지칠 무렵에 시도했던 일이었는데, 나는 피아노를 성당 반주할 정도로 칠 줄 아는 사람이고, 음악 코드도 거의 다 알고 있어서 기타를 쉽게 배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두 달 만에 처참히 실패하고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기타 배울 때 들었던 마음이 딱 여기 나와있었다. 강제성이 다소 포함된 어린이들의 흡수력, 어린이만의 유연성의 시기를 지난 어른은 뭔가를 새로 배우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울 만큼 힘들다. 그래서 <배움에는 때가 있다. 그때를 살고 있는 아이들이 참 부럽다. > 이것이 그때 한 생각이었다. 어린이들은 뭐든지 배울 수 있고 뭐든지 될 수 있는 존재. 지금은 내가 대부분 아이들을 가르치는 입장이지만, 꽤 높은 비율로 내가 아이들에게 배울 때도 있고, 조만간 아이들이 나보다 뛰어난 사람으로 자라 내가 애들한테 가르칠 것이 없게 될 것이라는 것도 그때 알았다. 작은 사람, 어린이들이 다시 보이기 시작한 순간.
내가 알기로는 13세, 6학년까지 어린이이다. 그 이후로는 청소년인데 우리 때만 해도 대개 청소년기에 사춘기를 맞았다. 그런데 요즘은 아이들의 성장발달이 빨라져 어린이 시기와 사춘기가 겹치는 경우가 많다. 사춘기에 진입한, 그러나 아직 어린이 나이의 사람들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예측 불가의 사람들이다. 머리채를 부여잡고 싸우는 놀이를 하질 않나, 가방을 패대기치며 친구의 신발을 뺏어 던지는 놀이를 하질 않나, 어른이 하는 것만큼의 찰진 욕을 입에 달고 다니질 않나, 내가 그래도 어른으로서 한소리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고민의 경계에 놓인, 나이는 어린이인데 어린이라고 하기엔 여러 가지로 애매한 사람들을 동네에서 종종 본다. 부끄럽지만 나는 그 애들을 솔직히 흉보고 싶다. 아마 그 세계관까지 이해하기에는 내가 이미 너무 빳빳하게 굳어버린 어른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 내가 예전에 학원에서 경험한 어린이의 세계를 되짚어 보고 지금도 진행 중인 어린이 (아들 둘)의 세계를 다시 바라볼 수 있었으며, 나의 그 시절도 그 가물가물해지는 기억을 더듬어 볼 수있어 좋았다. 개인적으로 이 책의 속편 <큰 어린이라는 세계- 사춘기 편>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이 작가의 독서교실에 다니는 아이들이 사춘기가 되었을 때 작가의 시선으로 바라본 사춘기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는다면, 앞으로 다가올 우리 아이들의 사춘기가 벌써 걱정될 정도로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사춘기 아이들의 세계도 조금 더 유연한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을 읽고 나니 나도 영어교실에 독서교실도 함께 열고 싶다는 소망이 생겼다. 우리 아이가 반길 것 같진 않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