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쩍 일이 하고 싶던 요즘이었다. 몇 년을 집에서 애만 보니 내 안에 있는 사회적 자아가 꿈틀거린다. 돈도 더 필요하고, 몇 년째 휴면 중인 사회성이 완전히 파기될까 겁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바빠야 아이와 앞으로 더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내년이면 초등학생인데, 엄마가 보기에 아들은 허점투성이라 하나부터 열까지 쫓아다니며 잔소리를 하고 있어서, 내가 바빠야 그 꼴을 덜 보지, 바빠서 그 꼴을 못 봐야 서로 편하지 싶은 생각이 뭉게뭉게 들던 차였다. 손 씻고 나온 아들의 손에는 비누가 그대로 묻어 있고, 유치원에서 밥은 어떻게 먹고 오는 건지 밥풀이 어깨에 묻어 있질 않나, 가방엔 쓰레기가 가득 있고, 내가 소식지를 챙겨보지 않으면 숲 체험 간식 챙기는 것도 얘기를 안 해서 친구 간식을 얻어먹고 오는 실정이니, 아이의 일상 챙기기부터 공부까지 잔소리 게이지를 계속 올라만 갔다. 언제까지 이렇게 치다꺼리를 할 수도 없고, 내가 바빠서 못 챙겨줘야 지가 지를 챙기겠다 싶은 생각에 이젠 아들과 조금 멀어져야 할 때가 오려고 하는구나. 싶던 차였다.
잔소리는 매일매일 진화한다. 하루하루 나의 엄마 지수가 올라가고, 아들의 한 수 두수 세수가 눈에 점점 보이더니 저만치 앞까지 훤히 내다 보이는 경지에 이르렀다. 이른바 미리 잔소리 하기. 헬리콥터 맘도 모자라 잔디깎이 맘이라고 미리 잔소리를 해서 장애물을 깎아 없애 주는 그런 엄마. 나는 그런 엄마가 되고 싶지 않은데, 내 잔소리의 경지는 이미 그런 수준에 육박하고 있었다. 그 잔소리는 아들도 싫겠지만, 나도 싫었다. 잔소리를 해야 하는 상황이 싫다기보다 그런 내가 싫었다.
나에게는 40년 넘게 성공적으로 살아온 내 삶의 노하우가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는데 꿀짱아가 하려는 일은 대부분 그 판단들과 거꾸로 달리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꿀짱아가 하려는 일에 대해 내가 자세하게 알면 알수록 내 머릿속 개구리들의 목청이 높아졌다. 그래서는 안 돼,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순서가 틀렸어. 이대로 내버려 두어서는 안 돼, 그건 부모로서 직무 유기야. 내가 꼼꼼히 챙길수록 꿀짱아는 더 반발했고 보란 듯이 침대에 처박혀 꼼짝도 하지 않으려 했다. 그렇다면 내가 챙기지 않고 놔두는 수밖에. 하지만 여기에도 함정이 있었는데 꿀짱아의 일상을 챙기지 않기로 결심하는 내 마음속에 굉장한 분노와 복수심이 숨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꿀짱아가 긍정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방법은 단 하나, 내가 그 일에 대해서 진실로 잘 모르는 길 뿐이었다. 꿀짱아의 과제물을 잊고, 중간고사를 잊고, 입시를 잊기는 쉽지 않았다. 꿀짱아의 스케줄을 잊지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노력을 다 쏟아부어야 했다. 첫째도 허술하고 둘째도 허술할 것.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부모가 되기에 이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는 것 같았다. 아이는 부모의 빈틈에서 자라기 때문에. 꿀짱아의 가정통신문과 교과 진도 등도 할머니가 알 만큼만 머릿속에 집어넣기로 했다. 이것저것 빵꾸가 나기 시작했고 남편과 꿀짱아가 당황스러워하는 순간들이 생겨났다. 아무래도 내가 관리할 때보다는 두서없고 효율이 떨어졌지만 효율 대신 자발성을 얻었다.
책에 정확한 답이 있었다. 아이는 부모의 빈틈에서 자란다.
이 책의 제목만 보고서는 할머니에 대한 절절한 사모곡, 아니 사조모곡 일 거라 생각했다. 나는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어서 이 절절한 이야기를 공감할 수 있을까 반신반의하며 구입한 책인데 이 책은 할머니를 그리는 내용이지만, 나에게는 육아서에 가까웠다. 할머니의 육아, 유난 떨지 않고도 확실하고, 소리치지 않고도 야단치며, 구구절절하지 않아도 위로와 안식을 주는 할머니의 육아. 나처럼 나 살기도 버거운데 남까지 키워야 하는 대업을 안고 동동거리는 엄마들에게(나에게) , 할 수 있는 게 잔소리뿐이라 잔소리를 최대치로 뽑아내고 있는 엄마들에게(나에게), 잔소리를 퍼붓다 퍼붓다 내 분에 겨워 결국엔 내 맘에, 네 맘에 상처를 내어 버리는 엄마들에게(나에게) 필요한 위로의 글이었다.
장혀.
할머니가 계셨다면, 잔소리를 퍼붓고는 돌아서 자책하는 나에게 해 주셨을 말, 장혀. 그 몸으로 아들을 둘씩이나 키우느라 장혀.
또 우리 아이들에게 해 주셨을 말. 장혀. 유치원도 다니고, 글씨 공부하고 영어공부까지 하느라 장혀.
할머니의 <그려, 안 뒤야. 뒤얐어. 몰러, 워쩌, 저런, 장혀.>라는, 확실한 옳고 그름과, 위로, 공감, 인정, 칭찬을 건네는 짧고도 강렬한 사랑의 말은 내 잔소리에 피곤해지는 나 포함 우리 가족 모두에게 필요한 말들이었다. 아이는 입학을 할 것이고 나는 학부형이 될 것이며 그럼으로 점점 더 거세어질 잔소리 폭탄을, 점점 많아질 말로 일어날 야단과 사달의 직격탄을 맞기 전에 이 책을 만나게 되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일상회복이다. 3년만에 운동회라니.
오늘 아이의 유치원 운동회가 있었다. 3년 만에 열린 운동회이고, 둘째 아이는 처음 경험하는 운동회이며, 큰 아이의 마지막 유치원 운동회였다. 코로나 상황이 예측이 안되니 미리 예정하기 힘들었는지, 시월 중순의 평일로 날짜가 갑자기 잡히는 바람에 신랑은 급작스런 연차를 내야 했고, 솔직히 나는 이러쿵저러쿵 불만도 많았던 터였다. 운동회 행사 안 하면 어때서 이런 번거로움을 만드나 하고 말이다. 그러면서도 할 건 다 했다. 옷장을 다 뒤져 청팀의 파란 옷을 찾아 입었고, 도대체 애들 운동회에 플랜카드까지 만드는 집이 어딨냐면서 결국 우리 집에서 제일 유난을 떨었다. 나한테 잔소리 들을까 봐 신랑은 재료를 몰래 사 와서는 불면증이 있는 나에게 얼른 자라며 성화를 바쳤고, 나는 이런 걸 뭐하러 만드냐고 혼꾸녕을 내고는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문구를 출력하고, 스티커를 붙이고, 색칠공부를 오려 넣는 등 작업을 진두지휘했다. 피곤했다. 그런 나 자신이 장했지만 한심했다.
플랜카드를 만든 집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급조한 우드락 응원판넬. 장혀. 근데 이게 뭔짓이여.
운동회에 가서 아이들과 함께 떼떼 거리며 펄쩍펄쩍 뛰며 생각했다. 이기고도 환호하고, 지고도 환호하고, 다치치만 말라고, 넘어져도 일어난 거 잘했다고, 끝까지 완주한 거 기특하다고 그러고 보니 오늘은 잔소리를 안 했네 하고 말이다. 그래. 운동회에 참여한 그 마음으로 아이들을 키워야겠다고 다짐한다. 내일이면 잊고 잔소리를 하겠지만, 하루라도 그렇게 할머니처럼 아이들을 편하게 대해야 애들이 숨을 좀 쉬지 않겠는가 하고 말이다. 장혀. 운동회도 했어. 안다치고 왔어. 장혀.
장혀, 애들 아부지.
참고로 이 책엔 형광펜 들고 밑줄 긋고 싶은 구절이 정말 많았다. 책은 깨끗하게 봐야 한다는 39년의 습관이 남아있어 차마 그렇게는 못했지만, 구구절절 할머니의 육아에 위로받았다. 읽을 때마다, 읽는 사람마다 소위 꽂히는 포인트가 다 다를 것 같아 여러 사람의 독후감이 더욱 기대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