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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멋쟁이 한제 Oct 10. 2022

아버지의 해방일지

긍게 사람이제.

아버지의 삼일장을 치르며, 딸이 상주로서 손님을 맞으며 엮어가는 사흘 동안의 이야기이다. 아버지를 조문하러 오는 사람들을 통해 아버지를 다시 만난다. 유시민 작가의 추천으로 사서는 단숨, 은 아니고 체력이 딸려 일박 이일에 걸쳐서 읽었다. 무거운 이야기인데 웃으며 읽을 수 있는 작가의 필력에 감탄하며 말이다. 배경은 전남 구례이다. 얼마 전에 남도 여행을 갔다가 구례를 지나 온 터라 더 반가운 마음이 있었다. 정말 깡 시골을 차를 타고 지나왔는데 소설 속 나오는 동네가 꼭 이런 동네이겠지, 그 마을 속 그런 집들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겠지 하니 상상이 더 수월했다. 무엇보다 활자로 읽는 전라도 사투리가 압권이었다. 조정래의 대하소설들을 읽으며 찰방진 남도 사투리의 매력에 푹 빠졌던 적이 있는데 그 기억도 되살아 났다.  


작가의 아버지, 극 중의 아리의 아버지는 전직 빨치산. 그런데 부르주아를 미워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노동을 싫어하는 빨치산이다. 다분히 인간적이다. 우리 아빠랑은 정치적 숙적이었을 것이다. 아빠는 빨치산을 미워했고 평생 노동을 하시며 성실을 삶의 가치로 여기셨던 분이니. 그런데 두 분은 왠지 무척 친하게 소주를 자셨을 것 같다. 서로 만나면 싸우고, 욕하면서도 사람은 좋다며 혹은 유일하게 마음의 결이 맞는 벗이라서.

소설 속에도 그런 장면이 있다. 베트남 전 참전용사 상이군인 노인이 전직 빨치산 아버지의 빈소에 조문을 온 장면. 이렇게 이 소설은 한국 현대사를 정통으로 뚫는다. 여순사건, 연좌제, 전기고문, 온갖 불행한 현대사의 면면들을 싹 다 훑으면서도 그 사건 자체보다, 인간관계, 사람 살이을 유머로, 위트로 채운다.


우리 아빠의 장례식이 떠올랐다. 코로나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한창일 때라 부고만 알리고 조문을 받지는 않겠다 했는데도 찾아와 준 지인들이 있었다. 고마운 일이다. 한적한 마을의 작은 장례식장이었고, 장례식장엔 아빠밖에 안 계셨고, 코로나 때문에 대부분 한산했던 장례식장을 아빠가 오히려 좋아했을 것 같았다. 잘 모르는 이들의 절을 받으면 아빠는 너무 면구스러워하셨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너무 많아 정신이 없어도 아빠는 예의 그 혼 빠진 얼굴을 하시며 정신 사납다고 혼자 계시고 싶어 하셨을 것 같았다. 우리 가족끼리만 온전히 아빠를 기억하고 추모할 수 있었으니 아빠는 더 좋아하셨을 거란 생각도 든다. 성당 연령회에서 다녀가시고, 아빠의 베트남전 전우회에서 다녀가시고, 몇 안 되는 친척 어른들 중에서 건강이 허락되시는 분들이 조문을 오시고, 엄마와 언니들, 나의 지인들 몇몇이 왔다가 가고, 아빠가 좋아하던 사부작사부작 이란 말처럼. 아빠의 장례식장은 사부작사부작 움직였다. 딱 아빠스럽게.


조용한 아빠의 장례식 장에서 아빠의 영정사진을 들여다보며 나는 생각했다.  아빠와 나는 아무런 구김이 없는 관계였어. 정말이었다. 아빠는 나를 무조건 적으로 예뻐했고, 그 흔한 잔소리, 소락대기 한 번 지르지 않으셨고, 나도 내가 아는 한은 아빠의 속을 크게 썩인 적이 없다. 우리는 그저 좋고도 좋은, 응어리 없는 관계일 거야. 限없이, 恨없이.


화장장에서 아빠의 마지막 유골을 보며, 아 아빠 이제 후련해 보인다. 고 생각했다. 하얀 유골, 아빠가 이제 훌훌 떠나는구나. 육신의 고통에서, 삶의 무게에서. 아빠의 뜨거운 유골함을 누가 봐도 집안 서열 꼴찌인 내가 덥석 안아 들었다. 이제 와서 하는 얘기지만, 딸만 셋을 둔 아빠의 장례 절차에서 부당함을 많이 느끼던 바였다. 상주는 큰 형부였고, 그다음이 열두 살 난 남자 조카, 그다음으로 내 남편과 아들들, 그리고 딸 셋은 원래 안 쳐주는데 요즘이라 절도 올리고 장례절차에도 참여할 수 있는 듯했다. 고로 딸 셋 중 막냉이인 나는 서열 꼴찌였다. (아니 도대체 시상이 워떤 시상인디그런 법이 다 있소. .- 표준어로 흉내 내는 남도 사투리)  근데도 아빠의 유골을 덥석 안아 드는 나를 아무도 말리는 사람이 없었고, 신랑이 자신의 손에 끼워져 있던 하얀 장갑을 벗어 말없이 내 손에 끼워주었다. 아빠는 그렇게 세상에서 훌훌 떠나 서열 꼴찌인 막내딸의 품에 안겨 아빠의 장지, 호국원으로 갔다.  당시에는 해방이란 말을 떠올리진 못했는데, 해방이란 말이 참 적절하지 싶다. 아빠의 삶은 피곤했고, 힘겨웠고, 버거웠다. 거기에서 벗어났으니 해방이 맞지. 그저 얼떨결에 서열 꼴찌에게 안긴 아빠가 언니들 다 제친 이 날강도 같은 년.이라고 하는 것 같아 울면서 웃었던 기억이다.   


아버지는 빨치산이 되기로 선택이라도 하였지만, 자신은 빨치산의 딸로 태어나겠다 선택한 적도 없는데, 빨치산의 딸이라서 당하기만 하고 살아왔던 지난날의 응어리들을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며 비로소 풀어놓는 소설을 읽으며 나도 우리 아빠를 다시 보낸다. 해방 직전에 태어나 육이오를 거쳐, 베트남전 파병을 가고, 군사정권을 지내고 민주화 시대에 조선일보를 읽으시며 (나름 정치적 편향을 피하고자 신문을 주기적으로 바꿔 읽으셨다. 조중동, 조중동, 이렇게) 베트남전우회 모임을 유일한 사교 모임으로 가지셨던 아빠를 기억한다.


천수관음보살만 팔이 천 개인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도 천 개의 얼굴이 있다. 나는 아버지의 몇 개의 얼굴을 보았을까? 내 평생 알아온 얼굴보다 장례식장에서 알게 된 얼굴이 더 많은 것도 같았다.

나는 아빠의 몇 개의 얼굴을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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